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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소개

+ 주보성인(김안드레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김대건성인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신 분으로서, 김제준(이냐시오)의 둘째 아들로 충남 당진군 솔뫼에서 1821년에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김진후(비오)는 조선교회 창설기에 입교하여 10여 년 간의 옥고를 치르고 1814년에 순교하였고, 부친 김제준(이냐시오)는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박해를 피해 부모와 함께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실로 들어가 그곳에서 자라던 성인은 1836년 15세 때 모방신부에게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최방제(프란치스코), 최양업(토마스) 두 소년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원에서 교육을 받은 성인은 1844년 부제로 서품되었고, 다음해 8월 17일 금가항(金家港)성당에서 페레올 고주교로부터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후 페레올 고주교와 다블뤼 안신부와 함께 배를 이용하여 조선에 입국했다. 약 1년간 전교에 힘쓰던 성인은 1846년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해 연평도에서 중국어선과 연락을 취하고 돌아 오는 길에 순위도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40여회의 신문과 고문을 받고 그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6년 시복되었다가 1984년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주보 성인의 유래]

 

어떤 직업,장소,국가,개인은 특정한 성인을 보호자로 삼아 존경하며, 그 성인을 통하여 하느님께 청원하며,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 이 성인을 수호성인, 혹은 주보성인, 보호성인이라 한다.

 

수호성인을 모시는 관습은 2개의 교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는 모든 성인의 통공(1고린 12;8,13)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들은 각자가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1고린13;18,28-30)는 바울로의 가르침이다.수호성인을 세우는 관습은 순교자의 묘지위에 성당을 건립하고 그 순교자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일이 많았던 사실에서 비롯한다. 그리하여 3세기경까지는 순교자만이 성당의 수호성인이 됭수 있었으나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에는 증거자,주교,선교사,성당의 창설자,신비(예를 들면 삼위일체,십자가,구세주)등도 성당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이처럼 수호성인의 관습은 성인 공경의 헌 형태로 생겨난 것이다. 한 개인이 수호성인을 모시는 관습은 이보다 늦게 생겨났다. 그러나 4세기초에는 그리스도적인 이름이나 성서적인 이름을 세례명(christian name)으로 선택하는 일이 상당히 널리 퍼져있었다. 이것은 세례명으로 선택한 성인을 따라 살겠다는 의지임과 동시에 이름을 바꿈에 따라 그 사람도 변화한다는 성서의 내용에 의거한 것이다.

 

즉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로 개명한 사례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수나 그리스도는 세례명으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리스나 스페인에서는 예외이다. 한편 직업이나 단체에 대한 수호성인도 있다. 이것은 교황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요컨데 요셉은 교회, 알로이시오는 청년과 학생, 빈친시오 아 바울로는 자선단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액션 단체,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는 출판단체, 어린예수의 성 데레사는 세계포교의 수호성인이다.

 

최초의 한국인 신부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사람, 세례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재복 보명은 지식. 관명은 내선. 본관은 김해.

 

[가문]

김대건은 1821년 (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재준과 상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1801년 때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 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은 솔뫼에서 안동 우련밭으로 피해 살다가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1816년 대구 감영 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그리고 종한의 딸 데레사는 1839년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당고개에서 교수되고, 그에 앞서 남편 손연욱(요셉)은 1824년 덕산에서 옥사 하였다, 또 진후의 아우 선후의 손자 제교와 진후의 넷째 아들 희연의 아들인 제항은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김대건의 숙부 제철의 아들인 진식은 1867년 공주에서, 선식은 해미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리고 김대건의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 었다. 이처럼 김대건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다. 김진후의 둘째 아들인 택현은 솔뫼를 떠나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동에 정착하였는데,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듯하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이 세례를 받은 것 은 1836년이었다. 그는 1836년 초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생애]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5일)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에 앞서 두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 발 되었는데 최양업(토마)은 2월6일에, 최방제는 3월14일에 각각 서울로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등 외국으로 유학 갈 공부를 하며 수련중에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은 7월11일에서야 이들과 합류하였다. 모방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 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 신학생들은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 조신철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신앙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 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 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10월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843년 4울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가 머물고 있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 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 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성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등을 방문했는데,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두 달이 조선에서 있은 사목 방문 활동의 전부였다.

 

그의 교회 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지책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 이었다. 그는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범하여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 .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채포되고 10일에는 해수 감영으로 이송되었다가 다음 날인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은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모래 사장에 가매장 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는 25편의 편지를 남겼는데. 한글본 1편 한문본 1편 나머지는 라틴어로 쓰여졌다. 라틴어 편지는 3편으로 비방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 전교회 은사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들로서 조선 입국 통로를 답사할 때의 보고와 옥중 편지이다. 서두를 "신자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한글 편지는 사형을 앞두고 옥중에서 조선 신자들에게 보낸 회유문이다. 한문 편지는 장문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입국 통로의 개척을 위한 네 번째 답사 여행 후 기록한 것인데 한문 진본은 없고 프랑스 번역본만이 남아 있다.

 

또한 그는 현재 파리 외방 전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2동의 라틴어 작문과 <조선 전도>도 작성했다. 이중 작문은 신학생 시절에 작성한 것이고 지도는 선교사의 조선 입국 안내를 위한 일종의 행정 지도로 부제이던 1845년 초 잠시 귀국했을 때 작성한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측 기록에는 김대건 신부가 옥중에 있을 때 정부 당국의 요청으로 세계 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상]

김대건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편지들과 선교사들의 편지뿐이다. 그 편지들은 자신이 겪고 있던 상황을 보고한 글이어서 사상을 체계적으로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형장에서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 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 였다. 나는 천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말했듯이, 그는 하느님과 한국 교회를 죽기까지 사랑하였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것은 신학교 교육과 그의 마음속에 축적되어 있던 가문의 신앙과 한국 전통 문화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대건은 당시 조선의 전통 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또 하나의 문명 세계인 서양의 학식을 신앙 실천을 통하여 전파하려 하였다. 그는 세계를 일종의 가부장적 공동체로 인식하여 하느님을 인류의 아버지라 하고 인류를 대가족이라 말하면서 모든 인류가 형제와 같이 결합되어 친구처럼 지내는 사해동포주의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계 인식은 중국과 조선을 사대 관계로 파악하고 조선을 중국의 종속국으로 인정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임박한 죽음을 의식하며 마카오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즉 중국의 황제가 조선 왕에게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하지 못하게 하고, 한국인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도록 명령한다면 해결될 것으로 믿고, 이 일은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가 중국 황제에게 협조를 요청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에서 는 1844년 중국과 프랑스간에 체결과 황포 조약에 따라 중국 황제가 선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중국인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는다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성공은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대건은 선교열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천주교를 박해하고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을 금지하며 처형하는 조선의 쇄국 정책을 야만적 행위라고까지 비난하였다. 그는 외부의 지원이 없이는 선교에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이 중국의 속국인 한국에서도 실현되기를 기대했으며, 선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은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무력으로 체결한 황포 조약이 한국에서도 적용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 호의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 교회를 구출하고 신앙의 자유를 성취하려는 일념과 민족 구원을 우선적으로 앞세운 나머지, 프랑스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기대한 것이다.

 

김대건이 지녔던 사상의 중핵은 효애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부터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해 온 전통적 신심의 바탕은 ‘대군대부’ 사상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인류의 대왕이며 공동의 아버지로 믿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왔던 김대건의 의식 방탕에는 전통적 신심이 잠재되어 있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공경한 신심은 한국인이 최고의 가치 덕목이며 윤리의 근본으로 삼아 왔던 효와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 효의 근본 정신은 귀중한 생명을 준 생명의 근원이며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준 부모에 대한 보은 행위이다. 따라서 효도가 인간의 당연한 도리인 반면에 불효는 인간의 가장 큰 죄였으므로 효도하지 않으면 자식도 사람도 아니었다. 효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아버지의 권한은 절대 군주적이었다. 자녀는 아버지에게 최대의 경애를 드리고 절대적으로 순명해야 하며, 아버지의 뜻을 정성으로 받들고 덕행을 실천하여야 했다. 그리고 떳떳한 사람으로 살아 명예를 빛내서 부모에게 영광을 돌려 드려야 했다. 그러나 효는 공경하고 사랑하는 정으로 결합할 때 참다운 의미가 있다. 이처럼 김대건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벌을 당하고 있다고 했으며, 신자들에게 효애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순교를 통하여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효애심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김대건은 하느님을 ‘임자라고 표현하였다. 인류를 대가족으로 표현하였듯이 하느님을 대가족의 가장인 임자로 여겼다. 그는 가정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지상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의 소유주이고 생사 여탈권을 가진 임자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존경과 위엄의 대상일 뿐 아니라 복종과 사랑의 대상이었고, 사람으로서 이러한 임자를 잊고 몰라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없는 쓸모 없는 인간이라 하였다. 비록 하느님을 위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상에 비할 데 없이 귀한 제자라는 이름을 받았더라도 성화(聖化)되고 의화(義化)되지 않는다면 세례 받은 의미가 없다 하였다. 더구나 죄에 죽고 하느님을 위해 살려는 생활을 포기하여 배은 망덕한다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므로, 배교는 보본과 보은을 저버리는 행위이자 큰 죄악이며, 하느님은 국가의 임금 위에 있는 지상 절대권자일 뿐 아니라 당신을 공경하도록 명령하므로 배반할 수 없다 하였다. 그는 하느님께 충실히 복종하며 순교한 것이다. 그의 효애 정신과 임자께 대한 순종은 교계 질서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서도 드러난다. 즉,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주교와 신부들의 죽음을 임자인 하느님께 대한 순정의 태도로 여겼고, 자신도 그러한 모범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래서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라는 주교의 명령에 항상 주저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실천하였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효애 정신을 강조하며 살았듯이 부모께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 김제준이 순교한 후 유랑하는 신세나 진배없었고, 그래서 그는 순교하기 전 주교에게 자기 어머니를 보살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김대건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효도의 시작이었다.

 

조선 사회는 신분 제도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조선 사회에 한국 천주교회는 교리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가르쳤고 신자들은 실제 생활에서 교리의 가르침을 향유했었다. 그러나 신분제적 의식을 완전히 탈피하거나 사회 체제를 변혁시키지 못하였듯이 김대건 역시 전통 사회의 관념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는 순위도에서 체포될 때, 그리고 해주 감영에서 문초 당할 때 자신의 신분이 양반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자신의 편지 말미에는 자기 이름 앞에 본관을 반드시 적을 정도로 한국의 전통 의식에 젖어 있던 한국인이었다.

 

김대건의 영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박해 시대 신자들의 영성과 동일하였다. 그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유교적인 효의 개념에다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앙이 혼합되어 있다.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은 창조주, 상선벌악을 결정하는 심판관, 모든 귄위의 절대자, 온갖 환난에서 보호해 주고 힘을 주는 분, 은총으로 섭리하는 분이었다. 또한 하느님을 군주제에 비유하여 임금 위에 있는 절대자로서 당신을 공경하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도록 애덕의 의무를 함께 명령하는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하느님의 자녀 된 증거로 이웃을 사랑하도록 간곡히 유언하였다.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으로 천당과 지옥, 그리고 사후 심판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인간이 항구히 거처할 곳이 아니고 사람은 잠깐 땅 위를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현세를 나그네의 여인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영복을 누릴 천당이고, 현세는 천당을 준비하는 곳이지만 현세의 선행에 따라 사후 천당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생전의 선행은 사후의 노자라고 말했다. 현재와 내세, 천당과 지옥은 긴장과 대립의 관계였다. 김대건은 현세를 천국을 얻기 위한 영혼의 전투장, 사형 집행장을 영혼이 재적해야 할 최후의 격전장으로 보았다. 그래서 천국을 얻으려면 마음을 허실하게 먹지 말고 주야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혼의 삼구와 투쟁하여 박해를 극복하라고 하였다.

 

그는 박해를 영혼의 위기로 보았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서 신자들을 전투장의 군사로 표현하였다. 신자들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사는 사람답게 박해에 굴복하여 사주 구령을 포기하지 말고, 하느님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가 된 신분을 증거 해야만 하였다. 그는 신자 공동체를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무기를 갖추고 전쟁터에 있는 전투적 공동체, 즉 신전지 교회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표현하며, 이미 만물이 그리스도께 굴복되었듯이 신자들도 예수의 편에 서서 악의 세력과 용감히 싸워 승리하라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무기는 그리스도였다. 악의 세력과 싸우는‘신전지 교회’의 모습은 사도 바오로의 옥중 서간인 에페소서 6장 10-20절을 연상케 한다. 김대건이 표현한 순교자의 영광은 개선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는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전투를 벌여 승리를 얻은 후, 붉은 옷을 두르고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도로 개선가를 부르며 들어갔을 것으로 말하면서 피악수선을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로 표현하였다. 박해 시대의 작품인 <사향가>의 가사 중에서는 전투적 공동체의 모습을 모방한 내용이 노래 불려지고 있다.

 

김대건의 순교 정신은 효애 정신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나 그는 순교를 그리스도의 순교와 연결지어 말하고 있다. 그는 순교를 하느님께 순종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하나의 덕행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순종하며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고 맡겨진 목자로서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증거로 자유로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한국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한 선교사들의 원형으로 말하고, 순교를 사목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도가 당신 양들을 위하여 자의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듯이 사목자라면 양들을 위하여 자의적으로 최고의 청원인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의식하고, 자기의 죽음을 목자로서의 사명과 불가분의 일로 여겼다.

 

김대건은 그리스도께 자기를 전적으로 내맡기며 그리스도의 승리와 은총을 굳게 믿었다. 그는 옥중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박 당해 있으며, 그리스도의 승리와 은총을 굳게 믿는다 하였다. 김대건은 교회의 시작을 그리스도의 순교로부터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무수한 수난을 받고 순교로써 교회를 세웠듯이 교회도 당연히 수난을 겪으면서 자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시련을 견디는 충실한 신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한 몸 같이 형제애를 나누며, 낙담하지 말고 자시 자신에게 충실하며, 마음을 견고하게 다지고 박해에 임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희망도 강하였다. 그는 배를 타고 항해일 때나 대륙을 여행할 때나 급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성모께 깊이 의탁하고 보호를 청하였다. 그러나 성모께 갖는 희망은 ‘하느님 다음’임 밝혔다.

 

김대건은 한국 천주교회 설립 후 한국 교회의 희원을 이룬 첫 사제였다.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당시의 조선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는 “영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신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 학문을 직접 수학하고 체득한 지식인답게 세계 조류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계 정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문호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 발전에 유익한 일임을 역설한 선각자였다. 그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힌 사람 답게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도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했고, 하느님과 교회, 교회의 장상과 동료들, 그리고 신자들을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였다. 그는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다가 죽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였다.

 

 

 

[출처 : 한국 가톨릭 대사전]

성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


1845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역사적인 해이다.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그 해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 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솔뫼는 바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조부 김택현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김해 김씨 안경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증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바로 이곳에서 김 신부는 1846년 사제품 받은 지 1년 만에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을 채웠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배웠던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 생활에 전념한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된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전주,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가고 이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 마침내 76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슬라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갈 때까지 소년 시절을 보낸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물과 집터만 남아있고 대나무들이 주위에 있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의 15년간의 긴 옥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져만 갔다. 셋재아들 한현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했다. 둘째아들 택현은 1827년에 그의 아들 김제준과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돼 그 해 10월 귀국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직을 은이 마을로 정한 뒤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 역시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쳤다. 1814년 김진후로부터 시작돼 김대건 신부까지 30여 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솔뫼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은 1846년에 성역화 사업이 시작돼 기념비를 세웠고 생가 터를 매입했으며 성인의 동상과 탑이 건립됐다. 탄생 장소와 생가 터에는 아직도 300여 년의 연륜을 지닌 소나무들이 무성하고 오른편 숲 속에는 김 신부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솔뫼의 역사를 굽어보았던 소나무들이 30여 그루나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있는 우물터에는 아직도 지하수가 솟아나고 있다. 1983년에는 솔뫼 피정의 집이 완공돼 사적지를 찾는 순레자들의 피정을 주선하고 있다. 피정의 집 성당 안에는 김 신부의 영정과 유해가 모셔져 있기도 하다. 또 순례자를 정겨운 시선으로 맞는 솔뫼의 성모상은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2미터 크기의 상이다. 소나무 숲을 따라 만들어 둔 14처 끝에는 김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3미터 높이의 이 청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를 두른 모습으로 바로 뒤에는 보호자인 성모를 의미하는 흰 탑을 세웠다.


성지관리 : 솔뫼 피정의 집 (041-362-5021/2)

골배마실ㆍ은이성지

용인지방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역사


용인지방에 천주교의 전래가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첫 신앙 운동이 시작된 (1777 ∼ 1779년) 천진암과 경기도 광주등이 용인과 인접한 거리라는 사실로 보아 다른지역보다 상당히 일찍이 복음이 이루어졌으리라 여겨진다. 첫 박해인 신유년(1801년) 박해 때부터 각지에 흩어진 이곳 용인지방으로 숨어 들었다. 용인지방에는 오래된 전설을 갖고 있는 교우촌으로 사리틔(현 용인시 이동면 서리)에 전해오는 <신부터>, <붉은 고개>에 관한 이야기와 태화산 중턱에 <성지굴>이 있다. 문헌상으로는 1827년 정해박해 때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살다가 포교에게 잡혀 진주 감옥에서 1839년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가 1815년 을해박해를 피해 경기 용인 지방으로 피신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그때 이미 순교자의 2∼3가족이 용인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이로써 1815년 을해박해 때 이미 용인 지역에 교우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용인지방에 알려진 교우촌으로는 은이, 골배마실, 한터, 사리틔, 먹뱅이, 한덕골, 손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등이 있다.


소년 김대건과 골배마실 성지


김대건의 본관은 김해이고, 증조부는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8~1814)이며, 조부는 김택현(金澤鉉)이다.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 성인과 모친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충청도 솔뫼에서 출생하였다. 대건의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며,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으로 관명(冠名)은 대건(大建)이다. 김대건의 가문에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분은 증조부 김진후였다. 그는 1791년(신해박해)에 체포되어 1801년(신유박해) 때 유배되었다가 1805년 다시 잡혀 충청도 해미에서 10년간의 옥중 생활중 1814년에 순교하였다.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과 가족들은 1827년 경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으로 피신하여 골배마실(한덕동 경유)에 정착하였다. 이 때 소년 김대건의 나이 7세였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나오는 곳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옛날부터 신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김대건 신부의 집터가 있는 장소로 알려져 왔던 이곳은 1961년 양지 본당 5대 정원진 루가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둘장등을 발견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신부와 은이성지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활동은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은이는 박해시대 숨어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룩된 교우촌이고,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서울, 경기(용인) 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이 은이 공소는 이미 유학 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교회 사상 처음 발굴된 성소가 비로소 결실을 맺은 곳이 '은이성지'이다. 이렇게 은이 공소는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 첫 사목 지역이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상 본방인 사제가 사목한 최초의 본당이었다. 이 시기에 김대건 신부는 서울과 경기 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에 행하신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 모습이 1866년(병인박해)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 가문 정 레오 신부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김 신부님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대문밖 에 오시어 '정생원! 정생원!'하며 증조부 바오로를 소리에 식구들은 모두 잠이 깨었으나 누가 무슨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복사가 작은 목소리로 '김 신부님께서 성사주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 증조부 바오로께서는 이웃이 알까 쉬쉬하며 반가이 신부님을 방으로 뫼시고 곧 성사 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는 간단하였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가상을 정성되이 건다. 김 신부님께서는 10여명의 고해자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다시 배마실(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성당 소재지)로 가시어 거기서 성사를 주시고 '은이'로 가시면 날이 샌다고 하신다. 이 증언에서 보는바와 같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면서 사목활동을 하셨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곧이어 조선에 입국하게 될 매스뜨로 신부와 최양업 도마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가 맡겨진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가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체포와 순교의 발자취


선교사의 입국로를 준비하던 김대건 신부와 일행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순위도에서 포졸에게 1846년 6월 5일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된다. 해주 감영에 이어 포도청으로 이송된 김대건 신부는 40여 차례의 모진 심문을 당하게 되고, 이 시기에 조정의 대신들에게 서양 학문을 일깨워 주는 활동을 하게 된다. 처형되기 한달 전에는 마지막으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회유문'을 작성하였다. 그 해 9월 15일에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날인 9월 16일에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된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먹뱅이(묵리)에 살던 이민식(빈첸시오)과 몇몇 교우들이 몰래 빼내어 10월 26일에 미리내에 안장하게 된다. 그때부터 교우들은 생전에는 사목활동을 위한 길이오, 순교하신 뒤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갔던 이송길을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 열정과 순교 정신을 본받고자 기도하며 순례하기 시작하였고, 은이 성지에서 미리내 성지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세 고개를 신덕(信德)고개 (어은이 고개), 망덕(望德)고개 (해실이 고개), 애덕(愛德)고개 (오두재 고개)라 이름지어 부르며 고귀한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정신을 기념하는 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문 의 처 : 양지 성당 (사무실 : 031-338-3374)

김대건 신부의 첫발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금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야 한가운데 사발을 엎어놓은 듯 작은 산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華山)'이라 이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가 펼쳐진다. 이름하여 나바위.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이곳이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얹어 한국에 첫발을 디딘 곳이다. 김 신부로서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다.


그 때는 나바위 바로 발끝을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하구로부터 거슬러 올라오자면 황산포(지금의 강경)가 가장 큰 포구였고 나바위는 황산포를 3킬로미터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이다.


당시 고국 땅을 밟은 김 신부의 감회가 사뭇 어떠했을 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1784년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 첫 신부로 맞았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6년 만인 1801년에 순교했고 그 뒤 33년간 목자 없는 양 떼였고 다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을 맞이했으나 그나마 1839년에 모두 잃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또다시 한국 교회는 한 분의 사제도 없는 암흑기를 지내야 했던 것이다. 목자를 기다리는 한국 교회의 양 떼들에게 세 분 성직자의 입국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으며 김 신부 자신도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던 고국에서 첫 방인 사제로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나바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 만장한 것이었다. 1836년 12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뒤 그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는다. 하지만 3개월 뒤 다시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 김가항 성당에서 8월 17일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는다.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길을 갔던 조선인 선원들과 두 분 성직자를 모신 김 신부는 첫 방인 신부로 나바위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귀국한 지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비록 고국에서의 사목 활동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총명함과 굳건한 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에 설립됐으나 성당 건물은 1906년에 완공됐다. 1916년에는 목조벽을 벽돌로 바꾸고 고딕식 벽돌 조종각을 증축했다. 한옥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성당은 특히 회랑으로 인하여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 지방 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돼 있다. 1997년에 1백주년을 맞는 나바위성당은 일제시대, 6.25를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계명 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문 의 처 : 화산 성당 (사무실 : 063-861-8182)


최초의 선교자가 목을 떨군 곳

서울 용산구 이촌동 199의 1번지. 1호선 전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보면 말끔하게 단장된 커다란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한 이 집이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이다. 이제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이곳이 순교 터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 숲을 배경으로 산뜻한 풍모의 건물이 자리 잡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4세기를 건너뛴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 부터이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북경 교구는 교회 창립(1784년) 11년 뒤인 1795년에 주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사제인 주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세, 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받아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杖殺) 로 순교한다. 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 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양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동안 형리들이 지켰다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주 신부를 잃은지 30년만인 l831년에 조선 교구가 설정돼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을 얻은 데 이어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그 후 1년 만에 조선 교회는 신자가 9천 명으로 늘어났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1839년 기해박해는 이들 3명의 외국인 사제를 38년전 주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우들은 포졸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 했다가 4년 후 삼성산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다시 7년 뒤인 병오년(1846년)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된다. 그리고 다시 20년 후, 전국적으로 수만명의 목숨을 안아 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주교, 브르트니에르,볼리외 ,도리,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 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성당이 분리,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 복자 수도회에서 현재의 성전을 건립해 봉헌했다.


문의: 새남터 성당 (02) 713-3680


천주교 선교 지역을 이루었던 곳 미리내 성지

우리나라의 초기 천주교의 역사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순교의 역사이다. 본래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 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이다.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우고 있는 미리내는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종교탄압이었던 신유박해(1801년) 와 기해박해(1839년)를 피해 신앙심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심산 유곡으로 숨어 들어와 교우들이 냇가(지금은 복개되었음)를 중심으로 화전을 일구고, 그릇을 굽는 일을 하며 연명해 오다가 교우촌을 형성하였으며 병오(1846) 박해 때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밤이면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달빛 아래 비치는 냇물과 어우러져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하여 '미리내'로 불리우기 시작했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숨어 살던 교우촌이라고 해서 '한국의 카타꼼바'라고도 불렀다. 미리내는 박해시 주요 교우촌으로, 또 교우들의 정신적 안식처로써 교회 안에서 주목을 받고, 순교의 얼을 담고 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자 십자가의 길, 겟세마니 동산, 로사리오 15단길 등 기도하는 성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리내 성지의 형성 과정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순교 44일 후인 1846년 10월 30일 미리내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당년 17세)가 관헌들의 눈길을 피해 모셔와 미리내 자신의 선산에 안장하였고, 그 후 1901년 5월 18일 시복식 준비를 위해 그 유해를 서울 용산 신학교로 옮겼으나, 그 무덤은 현재의 자리에 계속 보존되어 참배하는 순례자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

1925년 7월 5일의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후 기념 경당을 미리내에 건립하여 1928년 9월 18일 순교자의 모후께 봉헌하였고 1984년 5월 6일 103위 한국 순교자들이 시성될 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그 대표 성인으로 추대 받았으며, 시성운동 책임 주교의 뜻에 따라 시성기념 성당을 미리내에 건립하여 1991년 5월 27일 천주성삼께 봉헌하였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수원교구 내 무명 순교자 무덤을 수원교구장의 뜻에 따라 미리내 성직자 묘지 윗자리에 옮겼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이윤일 요한 성인이라는 것이 밝혀져 성인께서 순교하신 대구 대교구의 관덕정으로 이장되어 대구 대교구 둘째 주보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현재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유해 중 두개골은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에 모셔져 있고 아랫턱 뼈는 미리내 성당에 모셔져 있다. 시성식 전에 교황청 시성조사 위원회에서 성인의 유해를 모셔 오라고 하여 종아리 뼈를 로마로 모셔 갔다가 되돌려 받아 현재의 자리인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기념 성당 큰 제대 밑에 모셨다.

그리고 순교자의 모후께 봉헌된 경당 좌편으로 성인을 위하여 한평생을 희생하신 모친 고 우술라 여사의 무덤과 성인의 시신을 미리내로 모시고 온 이민식 빈첸시오 회장의 무덤과 성인의 무덤 오른편에는 성인을 신품 주신 페레올 고 주교님의 무덤이 있고 그 왼편에는 미리내 초대 본당 신부인 강도영 마르꼬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페레올 고 주교님의 무덤 오른편에는 최초로 만주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신 최문식 베드로 신부의 무덤이 있다.

성지 관리실 : 031-674~1256

김대건 신부 마지막 회유


(이 글은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어체 한글 사본 '김대건 신부 마지막 회유'를 현대의 철자법으로 충실히 옮긴 것이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이 무시지시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같은 험하고 가련한 이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 데 없고, 비록 주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입교하여 주의 제자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오.

밭을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고 영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영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느니, 이같이 주이 땅을 밭으로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영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여문 자이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영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써 원수이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는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이 세상에 나서,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로 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나 계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려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 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키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교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이 돌아 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듯한 군난이 주명 (主命) 아니면 주상(主賞) 주벌(主罰)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 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 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해서 마치 용맹한 군사이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 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자이 이십인은 아직 주 은총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들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紙筆)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戰場)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를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받아, 위주광영하고 여등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구령사 (事主球靈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고(萬古) 수치하여 성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이 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이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은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하노라.

부감목 김 안드레아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이요, 막비주상주벌(莫非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 천주의 허락하신 바이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으로 주시기를 기다려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이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께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김신부 사정 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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