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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번째 서한 전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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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무 작성일21-09-01 20:30 조회1,4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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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감옥 안에서,1846년 8월 26일

 

주교님께서는 우리 가 하직한 이후로 서울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여행 준비가 되자 우리는 닻을 올리고 순풍을 타고 연평(延坪)바다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바다는 많은 어선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저의 일행은 생선을 사 가지고 그것을 다시 팔기 위해 순위도(巡威島)항구로 갔습니다.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들은 생선을 땅에 내려놓고 사공 한 사람을 시켜 

소금에 절이게 하였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항해를 계속하여 소강〔蘇江)과 마합(馬哈),터진목(Thetsinmok),

소청(小靑), 대청(大靑)섬들을 돌아 백령도 근처에 정박하였습니다. 

거기에 1백 척가량의 산동(仙東) 배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들은 해안 아주 가까이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물에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해변의 높은 곳과 산꼭대기에서 군인들이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보초를 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근 섬들에서 조선인 군중이 구경하러 중국인들 한테로 모여들었습니다. 

저도 직접 밤에 그들한테 가서 배 주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교님 편지들을 전하였습니다. 

 

또 저는 베르뇌 신부님, 메스트르 신부님, 리브와 신부님과 두 중국 교우에게 

편지 몇 장을 써 보냈고, 거기에 황해 해안의 섬들과 바위와 그 밖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 지도(地圖)두 장을 첨부해 보냈습니다. 

 

이 장소는 중국인들의 중개(仲介)를 조심해서 이용한다면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고 

편지를 전달하는 데 매우 유리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해마다 음력 3월 초쯤에 고기잡이하러 거기에 모이고, 

음력 5월 말경에 돌아갑니다.

 

주교님,우리는 주교님의 명령을 이행한 후 다시 떠나 순위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까지 저의 여행은 그 징조가 좋아 보였고,그래서 순조롭게 끝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해변에 내려놓았던 생선이 아직 마르지 않아 

이 항구에서의 우리의 체류가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제 하인 베난시오는 박해가 두려워 7년 동안 숨어 있던 집에 맡겨둔 돈을 

찾으러 가게 하선할 허락을 제게 청하였습니다.

 

그가 떠난 후 관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배로 와서 중국 배들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 배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조선 법은 공사(松事)로 양반의 배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주민들 사이에 

이 나라의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으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장에게 저의 배를 양보하면 제 체면을 잃게 되고, 

또 이후의 우리 원정에도 장애가 될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베난시오는 이런 경우에 취해야 할 행동 기준을 저에게 가르쳐 주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장에게 

내 배는 내가 사용해야 하고 따라서 그에게 양보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제게 욕을 퍼부으며 제 사공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은 저녁 때 다시 와서 둘째 사공을 붙잡아 관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사공들에게 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는데 그들의 대답이 저에 관해 

중대한 의혹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관장은 한 사공의 조모가 천주교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포졸들은 회의를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른 명이다. 만일 저자가 정말 양반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한두 명만 죽고 나머지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니 그자를 잡으러 가자.” 

 

그들은 밤에 기녀들 여럿을 데리고 와서는 격분하여 제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제 머리털을 잡아 한 움큼 뽑아내고, 저를 줄로 묶고,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매질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남아 있던 선원들은 야음을 타서 배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노를 저어 

달아났습니다. 해변에 이르자 포졸들이 제 옷을 벗기고, 저를 묶고,

저를 다시 때리고 비웃고 조롱하며 관장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장이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왜 왕명을 거슬러 그 종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 

“나는 그 교가 참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오. 

그 교는 천주를 공경하도록 나를 가르치고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저는 신문을 받았습니다. 

관장이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쳐 죽이게 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내 천주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내 교의 진리를 듣고 싶으면 들어 보시오. 내가 공경하는 천주는 

천지 신인 만물의 조물주이시고 상선벌악(賞善罰惡)을 하시는 분이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공경을 드려야 하오. 

관장님, 천주님의 사랑을 위해 고문을 받게 해준다면 감사하오. 

그리고 내 천주께서 당신을 더 높은 벼슬에 오르게 하여 

그 은혜를 갚아주시기를 기원하오.” 

이 말에 관장은 모인 사람들과 함께 웃어댔습니다.

 

곧이어 여덟 자 길이의 칼을 가지고 저에게 왔습니다. 

저는 즉시 그것을 들어 직접 제 목에 썼습니다. 좌중 곳곳에서 웃음이 터서 나왔습니다.

 

이미 배교한 두 사공과 함께 저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제 손과 발,목과 허리는 단단히 묶여 있어서 걸을 수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또 저를 구경하러 모여든 군중들에게서도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저는 밤의 일부를 그들에게 천주교를 설교하는 데 보냈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관심 있게 들었고 그것이 임금에 의해 금지되어 있지만 않다면 

믿을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포졸들은 제 보따리에서 중국의 물건들을 발견하였으므로 저를 그 나라 사람으로 

믿었습니다. 이튿날 관장이 저를 자기 앞에 출두시키고 저더러 중국인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니오. 조선 사람이오. ”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 말을 믿지 않고 “중국의 어느 지방 출신 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광동(鑛東)지방의 마카오에서 자랐고 천주교인이오. 호기심에서 

또 나의 종교를 전파하고 싶어서 이 해역에 오게 되었소.” 그

는 저를 다시 옥에 가두게 하였습니다.

 

닷새가 지난 후 아주 많은 포졸을 거느린 한 작은 관리가 도(道)의 수부인 

해주(海州)로 저를 압송 하였습니다. 감사(監司)가 저더러 중국인이냐고 묻기에 

저는 섬의 관리에게 한 것과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는 천주교에 관하여 제게 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즉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에게 영혼의 불멸(不減)함과 지옥과 천당,

천주의 존재와 사후의 행복을 위해 그분을 공경할 필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감사와 그의 부하들은 “당신이 하는 말이 옳고 합리적이긴 하지만 

임금이 천주교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지 않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어 그들은 교우들과 포교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하여 

제게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절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난 어조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형 벌로 고문을 하겠소. ”라고 

다시 말하였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말하고 

저는 형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그것들을 감사 발밑으로 집어 던지며

“자, 준비가 다 되었으니 치시오. 나는 당신들의 고문을 무서워하지 않소. ”라고 

감사에게 말했습니다. 

포졸들은 즉시 그것들을 치워 버렸습니다. 

감사의 이 하인들은 제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감사에게 말할 때는 자신을 소인(小人)이라고 하는 것이 관습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대인 이고 양반이오. 나는 그런 말은 모르오.” 

며칠 후 감사가 저를 다시 출두시키고 중국에 관한 질문으로 저를 괴롭혔는데,

어떤 때는 제가 정말 중국 사람인지 알려고 통역을 통해 저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제게 배교를 명하였습니다. 

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엾다는 표시로 빙그레 웃었습니다.

 

저와 함께 붙잡힌 두 교우는 잔인한 고문에 못 이겨 제가 서울에서 살던 집을 

일러바쳤고, 또 주교님의 복사인 이(재의)토마스와 그의 동생(삼촌의오류) 

마태오(마티아의 오류)와 그 밖의 몇몇 교우들을 고발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제가 중국 배들과 연락한 사실과 

그중 한 배에 서한들을 전달한 사실을 자백하였습니다. 

즉시 포졸 한 부대가 중국 배들이 있는 쪽으로 보내져서 

그 편지들을 감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아주 엄중하게 감시하였습니다. 우리를 각기 딴 감옥에 가두어 두고는 

병사 4명이 밤낮으로 우리를 지켰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고 

목에는 칼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 허리들은 하나의 긴 줄로 서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 사람은 필요한 배설을 하러 갈 때마다 그 줄 끝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제가 겪어야 했던 괴로움이 어떠하였을지는 주교님의 상상에 맡깁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병을 앓았을 때 치료받은 흡각(版角) 때문에 

제 가슴에 생긴 일곱상처 자국을 보고 병사들은 북두칠성이라고 하며 

갖은 희롱으로 저를 놀리며 좋아 들 하였습니다.

   흡각 : 거머리를 몸에 달라붙게 하여 병을 치료하면서 생긴 흠집


임금은 우리의 체포 소식을 접하자마자 우리를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포졸들을 보냈습니다. 임금에게는 저를 중국인이라고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길을 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감옥에서 처럼 포승줄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도둑이나 중죄인들처럼 우리의 팔을 홍사(紅絲)로 졸라 매었고,

머리를 거무스름한 천 자루로 씌웠습니다. 

 

길을 가면서 우리는 큰 피로를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군중이 우리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국인으로 통하였으므로 제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사람들이 나무나 지붕 위에 올라갔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여 우리는 포도청에 갇혔습니다. 포청 사람들은 제가 하는 말을 듣고는

“이 사람은 조선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판관들 앞에 출두하였습니다.

 

그들은 저더러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조선 사람이오. 

중국에서 자랐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저와 이야기를 하도록 중국어 통역들을 오게 하였습니다.

 

1839년의 박해 중에 그 배반자가 3명의 조선 소년이 서양말을 배우기 위해 

마카오에 보내졌다고 밀고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신분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붙잡힌 교우 중 한 사람이 제가 이 나라 사람이라고 

그들에게 고해바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그 세 소년 중 한 사람인 김 안드레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가 고국에 돌아오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판관들은 구경꾼들과 함께 

“가엾은 젊은이! 어려서부터 고생이 많았군!”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임금의 명령에 따라 저에게 배교를 명하였습니다. 

저는 “임금위에 천주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자신을 공경하도록 명하시므로 

그분을 배반하는 것은 임금의 명령이 정당화시킬 수 없는 범죄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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