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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스무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9-01 20:23 조회1,324회 댓글0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 10.9

 

여섯 번째 서한 

 1843. 1.15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일곱 번째 서한 

 1843. 2.16

 요동 백가점 

 리브와 

 미상

 

여덟 번째 서한 

 1844. 5.17

 몽골소팔가자 

 리브와

 1844. 9.29

 

아홉 번째 서한 

 1844.12.15

 몽골소팔가자

 페레올 

 미상 

 

 열 번째 서한 

 1845. 3.27

 서울돌우물골 

 리브와 

 1845.10.14

 

 열한 번째 서한 

 1845.4.6

 서울돌우물골 

 리브와

 미상

 

 ​열두 번째 서한 

 1845.4.7

 서울돌우물골

 리브와 

 미상

 

 열세 번째 서한 ​

 1845. 6.4

 상해 

 리브와

 1845.7.23

 

 열네 번째 서한

 ​1845. 6. 4

 상해

 페레올

 1845.7.23

 

 열다섯 번째 서한

 1845.6.

 상해

 고틀랑 

 미상

 유실

 ​열여섯 번째 서한

 1845.7.23

 상해

 리브와 

 ​1845.10.14

 

 ​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1845,3~4월 작성   

  7.23발송 

 서울돌우물골

 (상해)

 리브와

 ​1845.10.14

 

 열일곱 번째 서한

 ​1845.7.23

 상해

 페레올

 1845.10.14

 

 ​열여덟 번째 서한 

 1845 .11.20

 서울

 ​리브와 

 ​1846.4.11

 

 열아홉 번째 서한 

 1846.7.30

 옥중 

 베르뇌

메스트르

리브와

르그레즈와

 미상

 한지에 붓으로

작성 

 ​스무 번째 서한 

 ​1836.8.26 작성

 8.29 이후 발송

 ​옥중 

 페레올 

 미상

  *

 

 * 스무 번째 서한은  얇은 한지에 빈자리 없이 빽빽하게 라틴어로 작성했으나 

   원본은  유실되고  프랑스어 번역본 만 있다.  

    페레올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6년 11월 3일 자 서한에 이 프랑스어 역본이​ 삽입되어 있고 

   달레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도  이 서한이 수록되어 있다 



< 스무 번째 서한 작성 배경>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고 서해 바닷길을 개척하기 위해 연평도로 갔다. 매년 음력 3월에서 5월 사이에 연평도 앞바다는 중국 어선들이 몰려 와 조기를 잡아 가곤 했기 때문에   중국 교회에 전할 편지와 조선 지도 등을 전달하기 위해서 였다  


거기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지도 등을 건넸으나  조선 관리들이 김대건의 배를 징발하려는 과정에서 시비가 생겨 결국 김대건은 체포되고 말았다. 사실은 배를 징발한다는 핑계로 돈을 요구한 것인데 김대건 신부가 이에 응하지 않자 체포한 것이다


김대건을 체포한 그곳 관리가 "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하고 물었을 때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했다.  관리는"왜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를 믿는거요? 배교하시오" 했으나 김대건은 " 나는 그 교가 참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오. 그 교는 천주를 공경하도록 나를 가르치고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라고 하였다. 


김대건은 해주 감영으로 이송 되었을 때에도 중국인 행세를 하였으나 함께 체포된 임성룡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실을  실토하는 바람에  김대건 역시 자신이 조선인이며 마카오에 유학 다녀 온 사실도 밝혔다. 


해주 감영 관리들은 김대건 일행이 중국 어선에게 편지와 지도를 건넨 사실을 추궁하여 편지와 지도를 중국 어선으로부터 찾아 왔고 이를 엄중하게 여겨서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다.


조선의 임금(헌종)은 김대건에게 배교하라고 명을 내렸으나 김대건은 " 임금 위에 천주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자신을 공경하도록 명하시므로 그분을 배반하는 것은 임금의 명령이 정당화시킬 수 없는 범죄요" 라고 대답했으며 다른 교우들을 고발하라는 독촉에는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의무와 천주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김대건은 40여 차례의 문초 과정에서 천주교에 관한 질문을 받자  '천주의 존재와 그 단일성, 창조와 영혼의 불멸함과 지옥, 창조주를 흠숭할 필요성과 이교의 허위성 ' 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러한 설명을 들은 판관들은 천주교가 옳다는 건 인정하였지만 자신들의 종교(유교)도 옳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대건은 '그렇다면 천주교인 들을 박해 하는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스승 신부들과  페레올 주교에게 편지를 썼고 조선 신자들에게 보내는 회유문도 남겼다.  또한 조선 조정 대신들의 지시에 따라 영국의 세계지도 1장을 번역하여 채색된 2장의 사본을 만들었고 작은 지리개설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3척이 충청도 외연도 근처에 나타나 프랑스 선교사 3명의 죽음에 대해 항의하는 서한을 조선 당국에 전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서둘러 김대건을 처형하게 된다. 


김대건은 1846년 8월 29일 스무번 째 서한의 추신으로 프랑스 배가 조선에 왔다는 것을 알았고 이로 인해 자신들이 석방되리라 기대했으며, 만일 프랑스 함대가 위협만 하고 그대로 돌아가 버린다면 조선 교회에 큰 해를 끼치고 또한 김대건 자신은 죽기 전에 무서운 형벌에 처할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16일 김대건 신부 새남터에서 순교, 9월 19일 현석문 새남터에서 순교, 9월 20일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 등이 포도청에서 순교함으로서 끝을 맺었다.  


<참고> 


지리 개설서...감옥에 갇힌 김대건은 세계 지도와 지리 개설서 번역을 조정으로부터 의뢰 받아 지도를 번역해 헌종에게 바쳤다. 김대건의 박식함을 인정한 조정 일각에서는 그를 나라의 일꾼으로 중용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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