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성당사무실
화~금 09:00 ~ 18:00
토요일 09:00 ~ 18:00 미사 후
주일 06:30 ~ 19:00 미사 후
T. 02.2203.6161  
F. 02.2203.7171

점심시간
평   일           12:00 ~ 13:00
토요일           12:00 ~ 13:30
주   일           12:30 ~ 14:30
(월요일,  법정공휴일 휴무)
자유게시판

김대건 열아홉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31 16:43 조회1,355회 댓글0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 10.9

 

여섯 번째 서한 

 1843. 1.15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일곱 번째 서한 

 1843. 2.16

 요동 백가점 

 리브와 

 미상

 

여덟 번째 서한 

 1844. 5.17

 몽골소팔가자 

 리브와

 1844. 9.29

 

아홉 번째 서한 

 1844.12.15

 몽골소팔가자

 페레올 

 미상 

 

 열 번째 서한 

 1845. 3.27

 서울돌우물골 

 리브와 

 1845.10.14

 

 열한 번째 서한 

 1845.4.6

 서울돌우물골 

 리브와

 미상

 

 ​열두 번째 서한 

 1845.4.7

 서울돌우물골

 리브와 

 미상

 

 열세 번째 서한 ​

 1845. 6.4

 상해 

 리브와

 1845.7.23

 

 열네 번째 서한

 ​1845. 6. 4

 상해

 페레올

 1845.7.23

 

 열다섯 번째 서한

 1845.6.

 상해

 고틀랑 

 미상

 유실

 ​열여섯 번째 서한

 1845.7.23

 상해

 리브와 

 ​1845.10.14

 

 ​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1845,3~4월 작성   

  7.23발송 

 서울돌우물골

 (상해)

 리브와

 ​1845.10.14

 

 열일곱 번째 서한

 ​1845.7.23

 상해

 페레올

 1845.10.14

 

 ​열여덟 번째 서한 

 1845 .11.20

 서울

 ​리브와 

 ​1846.4.11

 

 열아홉 번째 서한 

 1846.7.30

 옥중 

 베르뇌

메스트르

리브와

르그레즈와

 미상

 한지에 붓으로

작성 

 



< 열아홉 번째 서한 작성 배경>


1844년 12월  김대건과 최양업이 함께 부제품을 받은 후 김대건은 1845년.8월 17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해 사목 활동을 했는데, 최양업은 나이가 한 살 모자라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고 메스트로 신부와 몽골 소팔가자에 머물러 있었다. 


1846년 1월 경에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훈춘으로 가서 2년마다 열리는 경원 개시(함경도 경원에서 2년에 한 번 열리는 개방 시장)를 통해 조선으로 입국 하려다가 만주 관헌이 그들을 체포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갔다. 


레올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서해 해로를 통해 입국하는 것이 좋겠다는 명을 내렸고, 이에 따라 김대건 신부는 1846년 5월 14일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했다. 


그리고 5월 25일 연평도에 도착했으며 5월 29일 순위도(황해도 옹진군 흥미면에 있는 섬)를 거쳐 28일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지도를 전하고 순위도 등산진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6월 5일 조선의 관리들이 중국 어선에 대응하기 위해 김대건 신부가 타던 배를 징발하겠다는 시비가 일어났고 김대건을 수상히 여긴 관리가 김대건 신부와 임성룡, 엄수를 잡아 가두었다. 


김대건 신부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 이의창과 노언익은 시비가 발생하기 전에 서울로 상경하였고 김성서, 안순명, 박성철은 피신하였다. 


관리들은 김대건 신부의 소지품을 보고 천주교 신자 임을 확인하였지만 그가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실을 황해 감사에게 알렸고  6월 10일 김대건 일행은 해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조선 당국에서는 이 사건을 민감하게 보고 김대건이  중국 어선에게 건넨 편지와 지도를 상부에 올리라고 했으며 임성룡과 엄수를 문초하여 임성룡의 아버지 임치백과 김성서의 아버지 김중수를 추가로 체포하였다. 


그리고 6월 21일 김대건 일행을 포도청으로 이송하여 7월 19일까지 문초를 했다. 김대건 신부는 처음에는 중국인이라고 했으나 결국 자신이 용인 출신이며 마카오에 유학한 사실을 실토하였다. 


하지만 조선 교회를 위태롭게 할 답변은 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위해 죽겠다는 말만  했다. 그리고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임치백에게는 세례를 주었다.


이러는 동안 서울에서도 현석문과  여교우(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등도 체포되었고 석정동 집에 있던 돈도 압수당했다. 


아직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체포되지 않았으나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다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 병오박해 丙午迫害 : 1846년  헌종 12년)  


때마침 그 해 9월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 함장이 배 3척을 이끌고 홍주(충청남도 홍성) 해역에 나타났다. 이들은 기해박해 (1839년 헌종 5년)때 프랑스 선교사(앵베르, 모방, 샤스탕)이 죽은 책임을 물으며  한불 통상교역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놀란 조선 조정에서는 김대건이 프랑스 함대를 불러 들였다면서 오히려 김대건의 처형을 서두르게 된다.


김대건 신부는 프랑스 영사가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서 신부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고 조선 신자들에게  신앙 자유를 허락하도록 하기를 바랐다.만일 중국 황제가 조선 왕에게 명한다면 이 뜻이 이뤄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김대건 신부는  열아홉 번째 서한에 자신의 스승인 베르뇌 주교, 메스트르 , 리브와, 르그레즈와 신부들에게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리고 최양업 부제에게 어머니 고우르술라를 돌봐 주기를 부탁하였다.


<참고>


병오박해1846년 헌종 12년,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

당시 우리 나라에 입국해 있던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J.J.)주교는 김대건과 함께 포교에 힘쓰는 한편, 우리 나라에 입국할 기회 만을 노리며 만주에 머물러 있던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을 맞아들일 방도를 강구하게 된다.


페레올은 종래의 잠입로였던 육로는 당국의 감시가 더욱 심해져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서해의 안전한 바닷길을 찾기 위해서 김대건을 황해도 서해안으로 보냈다


김대건은 1846년 5월 13일 서울을 떠나 황해도 연안의 백령도 해역으로 나가 청나라 배에 지도와 서신을 탁송하고, 귀로에 순위도에 들렀다가 우연한 일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대건은 등산진·옹진을 거쳐 해주감영으로 끌려가 신문을 받았는데, 그의 신분이 밝혀지자 해주감사는 일의 중대성에 놀라 곧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국사범으로 다루어져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교가 사학(邪學)이 아님을 주장하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는 한편, 세계의 정세를 알려 정부당국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는 동안 김대건과 함께 서해로 나갔던 선주 임성룡, 뱃사공 엄수 등 관련 교인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계속해서 선주의 아버지 임치백, 그와 함께 활동한 바 있는 현석문·한이형 등이 체포되었다. 때마침 그 해 9월 프랑스의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Cecil)이 군함 3척을 이끌고 홍주해역에 나타나, 1839년(헌종 5) 기해사옥 때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학살한 책임을 묻고 통교를 강력히 요구하게 되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긴장한 정부는 김대건 등의 처형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부 김대건은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함께 잡혀 있던 교인들 중 배교한 자들을 제외한 현석문·임치백·한이형·남경문,우술림,김임이,정철염 등 8인의 남녀교인들은 9월 20일 사형에 처해졌다.

이들 9인의 순교자들은 1925년 로마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다시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다음 백과 참고)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소서울시 송파구 신천동 11-2 천주교 신천동 성당 TEL02-2203-6161 FAX02-2203-7171

Copyright © Sincheon Catholic Church 2014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