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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번째 서한 전문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29 10:23 조회1,304회 댓글0건

본문

예수마리아 요셉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님께

(상해에서),1845년 7월 23일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공경하올 주교님께 벌써 편지를 올려야 하였습니다만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 보내신 서한은 영국 영사로부터 최근에 받았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주교님에 의해 조선에 파견된 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입국하였고 서울에서 교우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간 여러 번 고된 병에 걸려 심하게 앓았습니다. 교우들은 지금 박해를 받지 않고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만 목자가 없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신자 수가 날로 증가하고, 열심이 더해지고,배교자들이 더 좋은 결실을 위해 돌아오고 있으며,많은 외교인들이 가정에 전해 오는 오류들을 버리고 참 하느님께로 회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에 대해 아주 좋은 견해가 외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신자 수는 최소한 1만 명으로 추산되고 순교자 수는 처음부터 800명 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우들이 실제로 또는 확실한 박해를 받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그러나 매일같이 죽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가난하고 불쌍합니다. 주교님을 위해 집 한 채를 사서 그것을 어떤 교우에게 맡겼습니다. 또한 강남으로 오기 위해 배 두 척을 샀는데, 하나는 크고 또 하나는 작은데 폭풍우로 바다에서 잃었습니다.


강남으로 오는데 근 한 달이 걸렸고 두 번 폭풍우를 겪었습니다. 조선에서 저와 함께 떠난 교우들의 부모와 아내들의 행방은 모릅니다. 우리가 강남 근방의 바다에 있을 때 해적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정 성모 마리아의 보호로 감히 우리를 약탈하지 못했습니다. 오송과 상해에 도착했을 때 영사와 영국인들이 우리를 매우 친절하게 맞이하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우리가 육지로 해서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관례대로 우리의 도착을 황제에게 고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지금은 그 관리들이 저에게 경의를 표하고 이곳에 마음대로 체류하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가 영국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라워합니다. 또 제가 중국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저를 중국인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국 영사가 주교님이 보내신 편지를 받았다고. 그 사실을 저더러 주교님에게 보고하라고 하며 주교님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제게 건네주었습니다.(그러나 통역 없이 제게 이 말을 하였으므로 그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하였습니다.) 


더 명확하게 또 더 자세하게 주교님께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만 주위의 많은 일 때문에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미구에 주교님을 만나 뵐 것이고 또 리브와 신부님에게 자세히 이야기하였으므로 이 편지에서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교님의 도착을 날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에 자리가 충분하기 때문에 오실 때에는 가능한 한 무엇이든 가지고 오십시오. 조선에서 팔 만한 물건들은 서양 포목,천,비단과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조선 은전은 이런 모양입니다. 어떤 모양과 덩어리(즉 크기)에 관계없이 다 통용될 수 있습니다.

 

조선의 대신들은 프랑스 왕에 의해 조선에 파견되었다고 생각되는 프랑스 신부님들을 죽인 후에 몇 해 동안은 프랑스인들이 보상을 요구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왕이 보낸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프랑스 왕을 모욕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몇 해가 지나고 프랑스인들이 보상을 요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보자 다시 대담해져서 다시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베시 주교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는데 도중에 병에 걸리셨습니다.

고틀랑 신부님으로부터 580원을 받았습니다.

 

교우들이 주교님께 문안드립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가장 순종하는 아들 불초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참고.......


대목구...

정식 명칭은 교황대리감목구이다

이 제도는 17세기 이후 정식 교구로 설정되기 어려운 지역이나 새로운 선교지였던 

동양에서 실시되었다.  


조선대목구..

1660년 중국 남경에 남경교구가 설립되면서 그 당시 조선은 남경 교구에 속하였으나  실제로는 북경 교구와 더 밀접한 관계였다. 1784년 이승훈의 세례를 받음으로서 조선교회가 창설되었고 당시 북경대목구장이었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의 독립을 교황청에 건의하면서 1792년 조선교회는  북경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자  조선 교회는 다시 평신도들만의 교회가 되었다.  그 뒤 조선 교회 신자들은 북경 교구에 다시 성직자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1824년에 정하상, 유진길 등이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회의 실상과 성직자의 필요성을 청원했다. 

 

그러자 교황청에서도 이 문제를 적극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교회를 위해 북경 주교와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인 카펠라리 추기경의 도움이 컸다. 교황청에서는 조선 교회를 파리 외방전교회가 관리하도록 했는데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다른 전교회와의 마찰을 피하려고 난색을 표했다. 그 때 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으로 가겠다고 자원을 했다. 

 

교황청의 카펠라리 추기경이 1831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그레고리오 16세로 즉위하면서 1831년 9월 9일 마침내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었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 (1792-1835) 

프랑스 레사크 지방에서 태어나 카르카손 신학교에서 신품을 받고 모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1825년 33세의 나이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며 이듬해 태국의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1829년 보좌주교로 선정되었다.  바로 이때에 자발적으로 창설된 조선 교회가 조선대목구로 설정되자 그는 초대 대목구장을 자청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을 떠나 마카오에 와 있다가 조선으로 가기 위해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서만자까지 왔지만 열망하던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뇌일혈을 일으켜  선종하였다.   

 

브뤼기에르 대목구장이 조선에 들어 오기를 기다리던 모방 신부가 그곳에 가서 장례를 치렀는데 1931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전교 100주년을 맞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용산 성직자 묘지에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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