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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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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28 08:06 조회1,352회 댓글0건

본문

 

            김대건 부제가 여러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록한

​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몇몇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 


                      조선의 수도 서울, 즉

        한양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피를 흘린 순교자들....


갑사 명의 주교, 범(范世亨)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 조선 대목구장  

1837년 12월 18일에 조선에 도착, 2개월 안에 조선말을 익혀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교리서와 기도서를 조선말로 번역하였고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하며 신자들을 큰 애덕과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호위하였고 신자들의 미숙과 무지를 큰 인내심과 온정으로 참아 냈다.  신자들을 방문할 때에는 걸어서 다녔다.


박해가 심해지자 주교는 손경서 안드레아 집에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 배교자 김여상(김순성 : 요한)의 잔꾀로 발각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주교님 스스로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앵베로 주교의 권유로 모방,샤스탕 신부도 자수하여 모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재판관이  그들에게 하느님을 버리라고 하자 세 선교사는 "나는 하느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라고 소리쳤으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하자 "우리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들 나라에 왔습니다. 여기서 죽을 작정입니다" 하였다. 


이들은 주리질, 치도곤, 주장질, 학춤, 삼모장, 톱질, 형장 등 여러가지의 형벌을 받은 후에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한강 모래사장에 매장되었다가 약 7개월 후 노고산에 이장하였고 3년 후에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으로 이장하였다. 

** 갑사: capsa 교구

**명의 주교 : 주교 품을 받았으나 해당 교구에서 재치권을 행사할 수 없는 주교. 

  교황청에서 직책을 가진 주교나  교구장의 보좌 주교, 은퇴 주교 등


조선 선교지의 대목구장 직무 대행인 모방(Maubant)나 베드로 (羅佰多綠)

 모방 신부는 1836년1월부터 1839년 9월까지 자주 금식재를 지키며 때로는 맨발로 걸어서 신자들을 방문하였다. 백성들을 말과 모범으로 가르쳤고 정성을 기울여 성사를 집전했다. 


박해가 심해지자 샤스탕 신부에게 가서 함께 지내다가 앵베르 주교님의 자수 권유 편지를 두 번 받고 두 신부님은 포졸들에게 자수한 후 주교님과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샤스탕(Chastan) 정 야고보(鄭牙名佰)신부 

 샤스탕 신부는 천성이 유순하고 애덕이 특출하여 비참한 삶을 사는 교우들에게 무엇이든 후하게 나누어 주었으며 신자들이 성사를 받아 더욱 신심이 튼튼해지도록 배려하였다. 그는 교님의 자수 권유 편지를 받고는 마치 잔칫집에 가는 것처럼 기뻐하였다. 


샤스탕과 모방 신부는 1839년 9월 6일 공동명의로 파리 외방전교회 모든 회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조선의 교우들을 사랑하며 그들은 매우 열심한 신자들이고 순종적이라고' 적었다.  


*** 세 분의 성직자는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되었다.


       1839년에 서울에서 순교한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 

                 (살해된 시간 순서에 따라서)

 

이 아우구스티노(1787-1839) 李光獻 회장 : 조선 이름 치문

양반 가문 출신, 노름에 탐닉하는 생활을 하다가 30세에 아내,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 입교. 열성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다가 1839년 2월쯤 가족 전체와 함께 체포되어 배교를 회유받았으나 "하느님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라면서 심한 고문을 받은 후 1839년  4월 12(음력), 그의 나이 53세에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이 아우구스티노의 아내 권 바르바라(權喜)

남편을 따라 입교한 후 여러 차례의 박해에 모든 재산을 잃어 버렸으나 자기의 집을 공소로 차리고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영접하여 정성껏 시중을 들었다. 가족들 모두 체포되어 자녀들에 대한 애정으로 큰 고통을 겪었으나 모든 형벌을 이겨낸 다음 1839년 7월 26일(음력) 순교함.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이 아우구스티노의 딸(이) 아가타 (1823-1840)

모진 고문을 받고 그녀의 나이 17세였을 때 순교함 .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남 다미아노( 南明赫)회장 : 조선 이름 문화 (1802-1839)

양반 출신. 30세에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음. 가족을 잘 교육하고 냉담교우들을 격려하며 아기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에 힘썼다. 체포 된 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고 다른 신자들을 배신하라고 하였으나 자기 아내 이연희 마리아에게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는 편지를 쓰고 38세에 순교함.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남 다미아노의 아내 (이) 마리아(李連熙)(1804-1839)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비인도적인 고문을 받았고 자신의 12살 된 아들이 고문받는 것을 보고 "이는 천주의 영광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받은 후 1839년 7월 26일(음력) 서소문밖 형장에서 순교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권 베드로 (權得仁) 선도 (1805~1839)

​신자 부모에게서 출생, 1838년 음력 11월쯤 가족 전체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배교를 권하자 "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고 주인이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무수한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보은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며 이성을 타고난 인간은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감옥 안에서 채찍질을 너무 당하여 두 번씩이나 반죽음이 되었지만  사형장에 끌려 갔을 때 기쁨이 넘쳐 있어서 목이 잘린 다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1925년 복자, 1984년 시성 됨 


이 아가타 (李召史) : 과부 ​(1784-1839)

신망이 두터운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결혼 했으나 과부가 된 후  천주교에 입교했다.

1835년 남동생 이호영(순교 성인)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배교 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4년 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 음력 4월에  5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김 막달레나 (金業伊) : 과부  (1774-1839)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동정녀로  살려고 했으나 어머니가 시집을 보냈다. 남편이 죽은 후 많은 외교인을 전향 시켰고 죽어가는 이웃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어  3년 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66세 되던 1839년 4월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한 바르바라 (韓아기) : 과부 (1792-1839)

김 막달레나의 권고로 하느님께 전향한 후 신앙생활을 준행하였다

김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된 후 3년 간 감옥에 있다가  48세에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박 안나 (朴아기)(1763-1839)

어릴 때부터 신앙 생활을 준행 하다가 18세에 천주교 신자에게 시집을 갔다. 

1839년 음력 2월쯤 가족과 함께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부모가 배교할 것을 권하였으나 오로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것에만 진력하였다

1839년 음력 4월쯤  57세의 나이로 순교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김 아가타 (김아기) : 과부 (1790-1839)

개종 전에는 미신만 국세게 믿다가 오라버니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경문 등을 외우지 못해 세례를 못 받고 오직 예수 마리아만 안다고 하였다. 감옥 안에 있던 신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배교를 하지 않자 4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8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순교.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박 루치아(朴喜順) : 동정녀 (1801-1839)

궁녀 신분으로 30세쯤 천주교를 받아 들였고 궁궐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려워지자 병을 핑계삼아  궁궐에서 나와 살았다. 천주교를 반대하던 가족들을 전향시켰으며 자주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였다. 박해가 심해지자 전경협 아가다의 집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루치아의 언니 박 마리아(朴큰아기) (1786-1839)

궁궐에서 나온 박희순의 권면으로 조카 가족들과 함께 입교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궁녀 출신 전경협 아가다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이 요한 경삼 (광렬) (1795-1839)

조선교회의 밀사로  활동했으며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1836년  조신철, 정하상과 함께 샤스탕 신부를 영입하였다. 1839년 음력 2월쯤 체포되어 음력 6월 10일에 순교함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이 막달레나(李英喜), 허막달레나(許季任), 데레사(李梅任), 바르바라(李貞喜) : 친척들

이 막달레나는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천주교를 반대하자 어머니 허 막달레나, 언니 이 바르바라와 함께 몰래  신앙생활을 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명혁 다미아노의 집에 모여 있던 이 막달레나, 허막달레나와 고모 이 데레사, 언니 바르바라와 김성임 마르타, 김누시아는  순교를 결심하고 포졸들에게 자진하여 찾아 갔다.


이들은 자수했기 때문에 죄가 더 크다 하여 더욱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배교 권유를 물리치다가 1839년 음력 6월 10일, 이 막달레나는 31세의 나이로, 고모 데레사는 5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언니 바르바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음력 7월 26일, 41세의 나이로, 어머니 허 막달레나는 6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이들 모두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김 마르타(金成任) : 일명 부평집  (1790-1839)

경기도 부평 출신으로 결혼에 실패한 후 장님 점장이와 재혼하여 살던 중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뒤 남편이 사망하자 미신을 끊고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천한 일과 궂은 일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이매임 자매 등과 함께 자수하여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이 바르바라 : (이)막달레나 동정녀의 혈족 (1825-1839) 

이 영희 막달레나의 조카. 15세의 나이로 순교 옥사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김 로사(金老沙) : 과부: 일명 감골집(1784-1839)

남편이 죽은 후 참 하느님께 대한 경배로 전향하였다. 법정에서 배교를 강요 당할 때,

하느님은 만물의 최고 주님이시므로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고 다른 신자들을 배반하지도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기해년 음력 6월에 56세의 나이로 순교함.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원 마리아(元貴任) : 동정녀 (1818-1839)

고아로 자라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불타올라 동정을 서원하였다.

체포된 후 배교를 회유 받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1839년 음력 6월 10일에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김루치아 (金累時阿) : 일명 만물집 딸, 동정녀 (1818-1839)

어린 나이에 천주교 규율을 배웠으며 14세 때 동정을 서원하였다. 박해가 심해지자 이 영희 막달레나 등과 의논하여 자수하였는데,  판관이 배교를 권유하며 "너는 하느님을 본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백성이 눈으로 임금님을 못봐도 임금님 계시는 줄 알듯이 창조된 만물을 보면 자연의 어버이이신 하느님이 존재하심을 믿는다"고 하였다.

1839년 음력 6월 10일,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박 요한 명관 ( 朴厚載) (1799-1839)

189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가 순교한 후 가난하고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장성 한 다음에는 천주교 교리를 부지런히 배워 열심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많은 고문을 당한 후 1839년 음력 7월 26일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정 바오로 (丁夏祥) (1795-1839)

아버지 : 정철상 가롤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

어머니 : 유소사 체칠리아 1839년 11월 23일 감옥에서 옥사

형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

누이   : 정정혜 엘리사벳  1830년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가난과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평생 동정으로 지냈다

조선에 선교사를 영입하려고 북경을 8-9차례 왕래하여 유방제 신부를 모셔왔다.

그 후로도 변문을 통하여 조선에 오는 신부님들을 자기 집에 모셔다가 

성심껏 시중을 들었다.

앵베르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박해가 심해지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39년 음력 6월 6일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정하상은 자신이 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판관에게 주며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했는데 이로 인해 더욱 가혹한 고문을 받고 1839년 9월 22일 유진길과 함께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유 아우구스티노 용선(劉進吉) : 관리 (1791-1839)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 나 세상 만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관심을 갖던 중 1823년 '천주실의'를 읽고 교리를 터득하여 입교했다.  이 때 성직자 영입운동을 하던 정하상을 만나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맡으며 동참하엿다. 1824년 동지사로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1826년에는 교황에게 성직자  영입을 요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였다.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에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각각 입국하였다. 


기해박해 초기에는 정3품 당상 역관이라는 높은 지위와 대왕대비의 오라버니인 황산 과의 친분으로 체포되지 않았으나 황산이 죽자 1839년 7월 17일 체포되었고 세 선교사들과  함께 의금부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후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조 가롤로 명철 (신철 ) (1795-1839)

성녀 최영이의 남편, 성인 최창흡의 사위.

강원도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윈 후 잠시 중이 되었다가 환속했다. 23세부터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였으며 30세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을 하던 정하상, 유진길 등을 알게 되어 입교했고 그들의 일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순교하는 꿈을 두 번씩이나 꾸면서 체포 된 후에도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세 선교사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유 베드로 대철 : 관리이며 순교자인 유진길의 아들 (1826-1839)

유대철은 천주교를 미워하는 어머니와 누이와는 달리 신심 깊은 아버지를 따라 종교 교리를 부지런히 익히고 하느님을 위하여 순교할 원의가 가득 차 있어서  교우들이 체포 된  판결 법정으로 스스로 걸어 갔다.


배교의 말 한 마디만 하면 풀어 주려고 하였지만 유대철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말로 종교의 진리를 옹호하다가 1839년 음력 9월 25일 ,14세의 나이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정국보(프로타시오) (1790-1839) 

양반 가문 출신으로 30세에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고 입교하였다.

유방제 신부의 명에 따라 모든 신자들을 손님으로 받아 들였으며 1839년 음력 7월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형조 밥정에 가서는 배교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기 잘못을 깨닫고 다시 형조 법정으로 달려가 하느님을 위하여 죽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포졸들이 그를 미쳤다고 두 번씩이나 쫒아 냈지만 결국 치도곤 25대를 맞고 몸이 찢어 발겨져  1839년  5월 21일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됨. ​ 

 

....................


김대건 부제의  순교자 행적 보고서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김대건은 1846년 5월 서해 입국로를 개척하다가 6월 5일 체포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순교자들의 기록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이 글에서는 모진 고문이라는 간략한 말로 표현했지만  김대건은  여러 종류의 혹독한고문을 그림으로 그려서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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