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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교사에 관한 보고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26 11:05 조회1,293회 댓글0건

본문

​   ** 

   이 문서는 서한이 아니라  김대건 부제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는

   열여섯 번째 서한에 동봉된  보고서다.     

   김대건 부제는 1845년 3월과 4월 사이에 서울 돌우물골에서  

   여러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이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845년 7월 23일 리브와 신부에게 발송했고 10월 14일에  수취됐다.

   ** 


   


1. 조선 순교사에 관한 보고서 


제1부 : 조선 교회 설립에 관한 개요

조선은 여러가지 미신과 토속 신앙에 사로 잡혀 있었다

조상의 신령, 중국 철학인 유교, 석가의 불교, 성주, 터주, 삼신, 제석, 서낭당, 태백, 관우, 미륵 등등  각종 수호신들을 섬겼다. 이런 가운데에서 몇 명이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빛으로 참 하느님을 인식하고 섬기게 됐는데 북경을 드나들던 조선 사신들에 의하여 천주교 사상이 전파되고 천주교 서적이 들어 왔다.


홍유한 (1726-1785, 호는 농은),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이익(李瀷)의 제자, 

홍유한은 철학자로서 이미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자연적 사물의 이치로 스스로 깨닫고 가톨릭 서적을 연구함으로써 진리를 이해했으며 비록 세례는 안 받았으나  천주교 신자처럼 하느님을 공경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생애를 마쳤다.


이벽(1754-1785 : 세례자 요한. 호는 광암)  

당시 북경에서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종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783년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 사절단의 일원인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예수회를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가져 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서적과 성물을 조선에 가지고 와서 1784년 조선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소개되었다.그래서 많은 학자와 관리들이 가톨릭교의 진리를 깨닫고 여기에 매혹되어 그리스도께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열성적인 인물들..**.


이승훈(1756-1891):베드로. 서울 출생.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다가 이벽의 권유로 북경에 가서 한국 최초로 영세를 받고 천주교 서적과 성물 등을 가져 옴.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가 되었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던 중 체포되었을 때 집안 식구들이 탄압을 받자 배교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 와 가성직제도를 주도하며 세례와 견진 성사를 집전했다. 1790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윤유일이 돌아 와 가성직제도를 금지한다는 북경 교구 구베아 주교의 명을 받고는 다시 교회를 떠나 배교하였다.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또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다. 1794년 12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고 이듬해 6월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된 사건에 연루되어 예산으로 유배갔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되자 또다시 배교를 했지만 1802년 4월 8일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승훈은 여러 번 배교를 했지만 가성직제도를 주도하고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아들 이신규, 손자 이재의는 1866년에, 증손자 이연구, 이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권일신(1742-179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 암부르시오의 동생

1784년 이벽의 권유로 입교 .가성직 제도에서 신부로 활동하다가 

1791년 신유박해 때 예산으로 귀양가던 중 선종하였다.

       

이존창( 1759-1801) : 루도비코.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음, 

충청도 내포에서 활동을 해서  '내포의 사도'라 불리운다.  

가성직제도에서 신부로 활동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잡혀 한때 배교했으나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전보다 더욱 열심히 전교에 힘썼다. 성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오늘날 조선 교우 대부분이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공헌을 했다. 1795년 다시 체포되어 연금 생활을 하다가 1801년 서울로 압송되어 

4월 8일 정약종과 함께 순교하였다.


최창현 (1759-1801) 요한. 초기 교회의 총회장

역관 집안 출신으로 입교한 뒤 교회 서적 필사에 앞장섰다.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를 했으나 곧 이를 뉘우치고 신앙을 증언 한 뒤

1801년 4월 8일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유항검 (1756-1801) 아우구스티노. 전주 초넘이 출신

권일신에게 교리를 받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가성직제도에서 신부로 활동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



가성직제도 : 1786년 가을부터 1787년 봄까지 시행되었으며 이승훈, 권일신, 이존창, 홍낙민, 최창현 등이 사제로 활동했다. 그러나 북경교구에 문의한 결과 이것이 독성죄라는 것을 알고 즉시 폐지하였다. 그리고 성직자 영입을 위해 윤유일을 북경 교회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윤유일 (1760-1795) 바오로.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

예비신자였던 그는 1768년 북경 주교에게 이승훈, 권일신의 밀서를 전달하기 위해  동지사 일행으로 끼어 북경에 갔었고 1769년 다시 사제를 파견해 달라는 밀서를 갖고 북경에 갔다가 세례와 견진을 받았다.

1784년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의주 변문으로 가서 무사히 서울로 안내하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인도한 죄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윤지충 (1759-1791) 바오로.  조선 최초의 순교자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 학자로서 정약전에게 교리를 받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 신주를 불살랐다가(진산 사건) 관가에 고발되어 수감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배교하기를  강요 당했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불효불충 악덕죄로  1791년 12월 8일 참형되었다. 


  

<참고>


신해박해  (辛亥迫害: 1791년: 정조 15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없애고 신주를 불태우자(진산 사건)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791년 11월 28일 교주로 고발된 권일신과 서학서를 들여온 이승훈이 체포되고  서울에선 최필공을 비롯한 11명의 교우, 충청도에서는 이존창, 최창주를 비롯한 많은 교우가 체포되었으며 12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었다. 


을묘박해 (乙卯迫害 1795년 : 정조 19년)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한영익의 밀고로 조정에 알려지면서 주문모 신부는 피신했으나 윤유일, 최인길, 지황 등이 포도청에서 매를 맞고 

1798년 6월 28일 순교하였다. 


신유박해 (辛酉迫害 1801년 : 순조 1년)

천주교에 비교적 온화했던 정조가 죽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면서  오가작통법에 의해 박해가 시작되었다. 박해를 피해 서울로 온 정약종이  갖고 있던 주문모 신부의 편지가 발각되어 권일신, 정약종 등등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이 잡혔다. 이들 중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은 참수되었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하면서 유배되었다.  


박해는 지방으로 확대되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순교하였으며 여주와 양근에 살던 천주교인 여러 명도 순교하였다. 주로 남인이던 천주교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참수, 옥사, 유배됨으로써 박해가 끝난 것으로 보이다가 1801년 3월 12일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여 4월 19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주문모 신부를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 등 8명이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신유박해는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어 11월 5일  황사영이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하였고 12월 22일 '척사윤음'을 반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신유박해는 끝났다.  이 박해로 처형된 사람이 약 100명, 유배된 사람은 약 400명이어서 그 당시 천주교회는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황사영 (1775-1801) 알렉시오  

정조14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과거 급제 후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과 결혼한 인물. 그는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받아 읽은 후, 신자가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에 더욱 천주교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만난 다음에는 주 신부가 조직한 '명도회'의 일원이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배론으로 피신하여 박해상황과 교회 재건 방안에 대한 의견 등을 작성하여 (황사영의 백서 사건)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하였다.  

 

척사윤음 (斥邪綸音)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 배척하기 위해 임금이 내린 유시. 

조선 시대 때 척사윤음은 1801년, 1839년, 1866년, 1881년 등 모두 네번 반포되었다. 



** 

신유박해 이후 1819년, 1828년, 1833년, 1836년에도 박해가 일어났으며 

조선의 신자들은 33년 동안 목자 없이 지냈는데 1831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였다가 1836년 중국으로 돌아 갔다. 그리고 1836년 1월 12일  모방 신부, 12월 31일  샤스탕 신부, 1837년  12월 19일에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했다.

**


    제2부 : 1839년 기해 박해( 己亥迫害)의 진상 

김대건이 작성한 기해박해 진상은 배교자 김여상(김순성)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는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신자를 자처한 자인데 1839년 신자들에게 최대의 수난을 가져다 주었다. 김여상은 1838년 11월쯤  돈을 받고 신자들을 밀고하였다.

또한 1839년 음력 7월쯤 주교와 신부님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그래서 포졸들을 대동하여 다니면서 교우들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며 주교와 신부들의 거처를 캐 물었고 배교를 종용하였다.


박해를 받는 교우들 중에는 더욱 신앙을 공고히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배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여상은 배교자들과 짜고 앵베르 주교를 돕던 정화경 안드레아로 하여금 주교에게 왕실의 대비와 모든 대신들이 신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말을 하도록 했다. 이에 주교는 "너는 마귀한테 속았구나" 하고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 후에 모방과 샤스탕 신부를 체포하기 전에  이재의 토마스와 최형 베드로를 체포하였다. 주변 사정이 이렇게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자 앵베르 주교는 두 신부에게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주교님의 편지를 받고 두 신부는 순명하였는데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이 세 선교사는 1839년 9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순교 이후에도 2년 이상 박해를 받았다. 더구나 1839년에는 전국적으로 심한 흉년이 들어서 집도 없이 떠돌며 구걸하여 연명하였다. 


그러나 1845년 당시에는 차차 신앙심이 불타올라 열성이 자라고 배교자들은 뉘우치고 회두하며 사방에서 외교인들이 입교한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천주교는 지금 찬미를 받고 신자들은 정직한 사람들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추수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청하여 주십시오 " (김대건 서한집 16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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