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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열여섯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24 13:39 조회1,392회 댓글0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 10.9

 

여섯 번째 서한 

 1843. 1.15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일곱 번째 서한 

 1843. 2.16

 요동 백가점 

 리브와 

 미상

 

여덟 번째 서한 

 1844. 5.17

 몽골소팔가자 

 리브와

 1844. 9.29

 

아홉 번째 서한 

 1844.12.15

 몽골소팔가자

 페레올 

 미상 

 

 열 번째 서한 

 1845. 3.27

 서울돌우물골 

 리브와 

 1845.10.14

 

 열한 번째 서한 

 1845.4.6

 서울돌우물골 

 리브와

 미상

 

 ​열두 번째 서한 

 1845.4.7

 서울돌우물골

 리브와 

 미상

 

 열세 번째 서한 

 1845. 6.4

 상해 

 리브와

 1845.7.23

 

 열네 번째 서한

 ​1845. 6. 4

 상해

 페레올

 1845.7.23

 

 열다섯 번째 서한

 1845.6.

 상해

 고틀랑 

 미상

 유실

 ​열여섯 번째 서한

 1845.7.23

 상해

 리브와 

 1845.10.14

 

 


< 열여섯 번째 서한 작성 배경> 


1845년 1월 15일 부제의 신분으로 서울에 들어 온 김대건은 선교사가 없어 목자 잃은 양떼 처럼 암울한 조선 교회의 실상을 안타까워하며 직접 황해를 건너 상해로 갈 준비를 한 끝에 4월 30일 11명의 교우를 데리고 제물포를 출발했다. 


11명의 교우들 중 4명 만이 뱃사공이었고  배 자체도 바다에 나가본 적이 없는 작은 배였는데  첫날은 순풍을  따라 항해를 했으나 그 다음 사흘 동안은  큰 폭풍우를 만나 두 개의 돛대와 종선(만일을 대비하여 달고 온 배)도 끊어 버리고 식량도 바다에  버린 상태에서  오직 주님과 성모님께 의탁할 수 밖에 없었다.  


차츰 폭풍우가 잦아 들고 일행도 원기를 회복하면서 임시 돛대와 키를 만든 배는 중국 강남 땅 해안에 도착하였지만 상해까지 가려면 끌어줄 배가 있어야 하는데 마침 산동 배 한척이 나타나 협상 끝에 5월 28일 오송구까지 갈 수 있었다.


오송에서 중국 관리들은 김대건 일행을  당국에 고발하고 조선으로 돌려 보내려 하였으나  김대건은  태풍에 밀려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건의 배를 찾아 온 영국 배 상관에게는 우리는 선교사를 모시려 왔으니 우리를 중국 사람들로부터 보호해 주고 영사관을 안내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국인들의 배를 타고 상해로 가보니  이미 페레올 주교가 상해 영사관에 연락하여 놓은 상태였다.


상해에서는 상해 교구의 고틀랑 신부가 찾아와 고해성사와 미사를 봉헌해 주었고 예전에 남경조약 체결 때 보았던 상해 관리가 김대건을 알아 보고 자유롭게 상해에 체류하도록 해 주었다.


김대건은  배를 수리하면서 페레올 주교가  상해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열여섯 번째 서한을 작성하였고 1845년 3월-4월에 쓴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도 같이 동봉하여 발송했다. 


   

<참고>

 


당시 상해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일어난 모든 박해사건과 신도들의 순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고틀랑 신부는 1845 7월에 쓴 편지에게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선 대목朝鲜代牧인 페레올 주교는 그의 사랑하는 전교구로 가려고  국경지대에서 3년을 기다렸으나 조선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번에 그는 마카오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젊은 부제인 조선인을 불쌍한 조선으로 파견했다.

이 젊은 부제는 김대건인데 그는 이미 두 번 본국으로 들어가려고 시도를 했었다. 그 과정 중에 그가 처했던 위험과 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는데 두 번 모두 중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3번째에 드디어 조선으로 입국하는데 성공하였는데, 낮에는 자고 밤에 다니는 방법으로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진입했다. 누군가가 그는 외국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이라고 의심을 한다면 그는 반드시 끌려가서 참형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랜 기간 조선을 떠나 외국에 가서 유럽 언어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페레올 주교는 이 부제에게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만약 가능하다면 배 한 척을 구해서 교우들을 선원으로 충당한 후 상해로 와서 그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육로로는 조선으로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페레올 주교는 바다를 통해서 그의 전교구로 가려고 하였다. 안드레아 김대건은 주교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라 작은 배 한 척을 샀다. 

그러나 어떤 모양의 작은 배인가! 우리나라 선원(프랑스)들이 말하길 나무로 만든 신발 하나를 진열해 놓은 것 같으며, 바다를 항해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내지内地 하천을 다닐 수 있는 작은 배라고 하였다. 

출항하기로 한 날, 날씨가 좋아지기를 하루 기다린 다음, 부제는 그가 아는 가장 선량한 교우들을 몇 명 부르고, 그들에게는 어디로 가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 자신은 선장을 맡고, 4명의 사공이 있었으나 모든 선원들은 이번 항해에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항해를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들 조국의 해안을 벗어났다. 오직 작은 나침반을 이용하여 손님을 환영하지 않는 대제국 중국대륙을 찾아 떠났다. 

김대건은 프랑스에서 온 성상(성화) 한 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성상은 바다의 별이신 천주성모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를 그린 것인데, 기도할 때 필요한 것이다. 또한 그의 부친과 조부, 증조부의 도움(그들 세분은 모두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의 모친 또한 박해자의 손안에 투항했으나 잔혹한 관리들은 그녀가 스스로 교우라고 말하자 두려움을 느껴 잡아가는 것을 금지했다). 

선장을 맡은 우리의 젊은 부제에게 상해까지 항해하는데 필요한 것은 마리아의 성상과 김대건 조상들의 보살핌 외에 그의 용감한 믿음과 하늘의 특별한 보살핌뿐 이었다.

한바탕 몰아 닥친 무서운 폭풍우는 경험이 없는 항해자들을 사정없이 때려, 배의 돛대와 키를 부숴버려 작은 배는 거의 파손되었다. 당시 3일 동안 내린 폭풍우로 인해 상해와 강남에서는 잘 건조된 좋은 배도 거의 다 난파되어 30채이상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런 위험한 때에 배 안의 선원들은 모두 서로 두려워 낯빛은 새파랗게 질려 멍하니 안드레아만 바라볼 뿐이었다. 

용감하고 젊은 안드레아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앞에서 어떠한 공포심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세요” 그는 손으로 성모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성모 마리아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절대로 무서워 마시오. 우리들은 상해에 갈 것이고, 우리들은 우리들의 주교를 만나야 합니다." 안드레아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중국 모래선 한 척을 만났고, 상당한 금액의 돈을 준다고 약속한 후, 배 선장은 그들을 목적지까지 데려갔다. 중국 배에 이끌려서 조선의 작은 배는 올 해(1845년) 5월 28일 상해에 도착했다. 

오송항吴淞港에 도착한 조선의 배는 하나의 기이한 사건이었는데, 조선인들은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들 배의 구조와 중국 배는 아주 다르고, 그들의 복장은 중국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서양 의복처럼 아주 기괴하였다.

중국관리들이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안드레아 김대건은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안드레아는 마카오 외방전교회에서 불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는 곧 근처에 있는 몇 척의 영국 배를 방문하였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영국 배들은 그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와주고 보호해주겠다고 대답하였다. 힘있는 보호를 얻게 되자 김대건의 마음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오송항의 관리를 피하지 않고, 떳떳하게 그들을 찾아가서,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나서 상해에 가서 배를 수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안드레아는 지방관에게 그의 상사에게 자신이 상해에 가는 상황을 잘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보충해서 말하기를

 “ 조선배가 중국에 온 목적에 대해서, 중국의 법률적인 규정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다. 만약 중국인이 나를 도와주는 것을 거절한다면, 이곳에 있는 유럽인들이 나를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오송 항구의 관리는 예의 있게 그를 맞이하고 그의 배가 상해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후(5월 29일) 안드레아는 바로 영국영사를 찾아가서 만나고, 영국영사는 열렬하게 그를 맞이하고 교자(가마)를 이용하여 그를 중국인 교우 집으로 보냈다. 이 교우는 급하게 나에게(고틀랑 신부) 편지를 보내서 그가 이미 왔다고 말했다.

 나는 마카오에서 안드레아를 알았다. 또한 그가 상해를 경유하여 조선으로 갈 때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곧 안드레아가 묵고 있는 교우 집으로 갔다(실제로는 이틀 후임). 이 교우는 안드레아보다 더 두려워하였다. 

사제관으로 돌아온 나는 사람을 보내어 안드레아에게 돈을 보냈다. 그는 배 안에 있는 선원들이 가장 급하게 필요한 생활용품을 살 돈이 부족하였다. 후에 나는 그를 배로 돌아가게 했다. 작은 배 안에 있는 선원들은 이 새롭고 위험한 환경 하에서 급히 안드레아가 필요했을 것이다.

(배가 상해성上海城 부근에 정박해있을 때 선원들은 중국관장의 심문을 받았고, 수천 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이 구경을 하였다니 하니 중국인들에게는 옷차림이 다른 조선사람들의 모습이 구경거리였겠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어 천신만고 끝에 외국에 도착한 신도들은  또 다른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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