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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열세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21 22:34 조회1,323회 댓글0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 10.9

 

여섯 번째 서한 

 1843. 1.15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일곱 번째 서한 

 1843. 2.16

 요동 백가점 

 리브와 

 미상

 

여덟 번째 서한 

 1844. 5.17

 몽골 소팔가자 

 리브와

 1844. 9.29

 

아홉 번째 서한 

 1844.12.15

 몽골 소팔가자

 페레올 

 미상 

 

 열 번째 서한 

 1845. 3.27

 서울 돌우물골 

 리브와 

 1845.10.14

 

 열한 번째 서한 

 1845.4.6

 서울 돌우물골 

 리브와

 미상

 

 ​열두 번째 서한 

 1845.4.7

 서울 돌우물골

 리브와 

 미상

 

 열세 번째 서한 

 1845. 6. 4

 상해 

 리브와

 1845.7.23

 

 


< 열세 번째 서한 작성 배경> 


김대건은 상해로 가는 배를 준비해서 1845년 4월 30일 현석문 등 교우 11명과 함께 제물포를 출발하였다. 5월 28일 중국 오송에 도착했고  6월 4일에는  상해에 도착하여 리브와 신부에게 간략한 서한을 보낸다


편지는 간략하게 썼으나 그 과정은 너무나 어려움이 많은 고난의 길이었다. 그와 동행한 교우들은 현석문, 이재의, 최형,  등 11명이었다.


동행한 이들 중에는 4명 만이 뱃사공이었고 그 외에는 바다를 구경도 못해 본 사람들이었다.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배가 거의 침몰할 위기를 맞았고, 배를 가볍게 하려고 식량을 바다에 던져 버렸기 때문에 굶주린 일행은  극도로 탈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천신만고 끝에 중국 강남성 해안에 도달하였고  5월 28일  오송구를 거쳐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오송구와 상해에서 중국 관리들이 김대건 일행을 조사하려 했으나 김대건은 영국 주둔군 장교들을 방문해 도움을 요청하며 그들과 친밀함을 과시했고 또한 페레올 주교의 부탁으로 영국 영사가 도와주어 조사를 면하게 되었다. 


상해에 도착하자 강남대목구 소속 예수회 선교사인 고를랑 신부(1803-1856)가 김대건 일행을 찾아 와 고해 성사를 주고 미사도 봉헌하였다. 


위와 같은 내용은 1845년 7월 23일에 보내는 열여섯 번째 서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참고> 

페레올 주교 Ferreol, Jean Joseph(18081853).

조선 제3대 교구장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나 1838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된 후 1840년 마카오로 파견되었다. 그 후 중국 대륙을 횡단하고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에 도착하였다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 봉천까지 왔으나 요동 지방의 푸대접 때문에 서만자로 되돌아 갔다. 

 

요동 지방은 원래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 구역이었다가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관할이 되었는데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그곳 교우들에게 프랑스 선교사들을 받아 들이지 말라고 사주했기 때문에  푸대접이 일어났다.

 

 

서만자로 되돌아 온 페레올 신부는 1843년 만주 교구 베롤 주교로부터 주교품에 올랐다그러나 조선 입국이 여의치 않던 중 때마침 찾아 온 김대건을 먼저 조선 입국 시키기로 하고 마카오로 돌아갔다

 

갖은 고생 끝에 조선 입국에 성공한 김대건이 배를 구입하여 상해로 왔는데 거기에서 페레올 주교다뷜리 신부 등 세 사람은 서해를 건너 와서 충청도 나바위에 상륙하게 된다.(1845년 10월 12)

 

 

페레올 주교는 서울로 올라 와 전교 활동을 하던 중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거듭된 박해와 과중한 업무 속에서 건강을 잃게 되어 1853년 2월 3일 선종하였다그는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서 폐허가 되다시피한 조선 교회를 소생시키는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유해는 안성 미리내 성지 김대건 신부 옆에 안장되었다.   

베르뇌  주교 (1814-1866) : 한국명 장경일 

제4대 조선교구장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르망 교구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의 철학교수로 재직했다.  1841년 베트남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만주교구로 가서 12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1854년 만주 교구 에서 주교품을 받았고 1855년 제4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어 1856년 조선에 입국,  그 후 순교하기까지 10년 동안 배론 신학교 설립, 서울에 2개의 인쇄소 설립 등 교세 확장에 힘씀.


그러나 1866년 병인 박해 때 체포되어 3월 7일 브르트니에르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68년 시복되었고 1984년 시성됨. 

 


 


현석문 가롤로(1797-1846)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현계흠의 아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현경련(성인품)의 동생.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5살 때 부친이 순교한 후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7년 샤스탕 신부가 입국했을 때  그의 복사가 되어 각지를 다니며 전교했으며 1839년 기해박해로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교우 회장이 되어 성직자 없는 조선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순교자들의 기록을 수집 ,정리하여 '기해일기(己亥日記)를 편찬하였다.  또한 박해 받는 교우들을 찾아 다니며 위로 격려하는 한편 중국 교회와도 긴밀한 연락을 하였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입국한 지 얼마 안되어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7월 11일 정철염, 이간난, 김임이, 우술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9월 19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  1925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시성됨 



이재의 토마스(1785-1868)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의 손자.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 정하상 바오로와 반년 가까이 동거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앵베르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앵베르 주교가 순교할 때까지 복사로 일하였다. 


김대건 부제가 입국할 때 의주 변문에서 그를 영접하여  서울로 인도하였고  상해로 가는 뱃길에 동행하였으며 상해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교리를 더욱 깊이 연구하하다 페레올 주교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로 피난하여 화를 면했으나 1846년 체포되었을 때에는 배교를 하여 석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1868년 4월 3일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신부를  국내로 인도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5월 8일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최형 베드로 (1814-1866) 

최방제 신학생의 형.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 남문 밖에서 살았다. 14세 때 입교하여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였는데 동생 최방제는 마카오 유학 중 병사하였고 형 최수는 1866년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모방 신부의 복사로 여러 해 전교 활동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 된 후로 목수 일을 하며 묵주 제작과 교회 서적 간행을 하였다. 


베르뇌 주교 입국 후에는 교회 서적 출판 책임을 맡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많은 서적으로 인해 함께 체포되었고 3월 9일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1968년 시복, 1984년 시성됨. 


 


 

 

< 열세 번째 서한 전문>

 

예수마리아 요셉

리브와 신부님께

상해에서,1845년 6월 4일

 

공경하올 신부님!

 

작년에 조선 대목구의 감목이신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주교님의 선교지인 조선에 파견되었었습니다. 지금은 조선에서 준비를 끝내고 신자 11명과 함께 배로 상해에 왔습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님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대단히 분주하여 많은 것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후에 질서 정연하게 신부님께 편지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조선인 학생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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