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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서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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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18 06:58 조회1,390회 댓글0건

본문

열한 번째 서한

 

하느님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님께

서울에서, 1845년 4월 6일

 

공경하올 신부님,

 

제가 아직 중국에 있었을 때, 몇몇 주목할 만한 사람들한테 들었던 것인데,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이 포졸들의 손에 자수한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었고, 또 신자들이 배반자를 제외하고 마치 신부님들을 경멸하고 저버린 사람들처럼 비난받고 있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처해 있던 주변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주목하고 인식한다면, 어김없이 그들의 운명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신부님들은 확실히 체포될 위험에 놓여 있었고, 또 탈출하기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박해와 굶주림에 억눌려 있었고, 그들은 거의 모두가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로 도망 다니면서 사방에서 체포되어 몰살당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교 인들과 포졸들까지도 신자들을 동정할 정도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모두 신자들을 위해서 계셨고, 또 신자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모두가 신부님들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의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열성적으로 돌보셨습니다. 또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보호하려고 힘껏 애썼습니다. 신자들은 가능한 한 신부님들을 숨겨두려 하였고 신부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까지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자진하여 포졸들에게로 가셨고, 또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한사코 만류하지는 않았으며, 어떤 신자들은 포졸들을 찾으러 나가기도 하였음을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달리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다지도 좁은 왕국에서 조정은 신부님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고, 주교님은 신부님들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시어 신부님들을 부르셨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에 깔렸었고, 그들은 신부님들을 수색하면서 이미 문턱에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불가피한 사정에 몰려서 당신의 사랑하는 신부님들을 최후의 형장에 속히 오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신부님들은 주교님의 명령에 순명 하였고, 또 탈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잠깐은 탈출할 수 있었겠지만, 당신들이 구하려고 온 자기 양들을 위하여 많은 환난을 무릅쓰고 죽음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제 판단으로는 그것은 과오가 아니라 덕행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신부님들의 명령에 순종하여 포졸들을 찾으러 갔습니다. 신부님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당신의 제자인 유다에 의해서 넘겨졌고, 신부님들은 그들의 제자인 신자에 의하여 넘겨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죽음을 향해 가셨고, 신부님들은 주교님께 순종하시어 죽으러 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떠나가셨고, 신부님들은 최후의 만찬으로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떠나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양들을 위하여 자의로 자신을 죽음에 내맡기셨습니다. 이처럼 신부님들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의로 자신을 최고의 형벌에 내맡기셨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이 사제를 필요로 하는 처지에 있음을 모르지 않았고, 또 그들의 목숨이 귀중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들은 당신들이 죽은 다음에 미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고, 목자 없는 양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요 장차 이리와 늑대들이 주님의 양 떼를 잡아먹으리라는. 그것을 예견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죽음의 길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몰려와 모두가 슬픔에 젖어 목자들을 바라보면서 자기들을 고아로 남겨 놓고 죽음의 길로 떠나가지 마시라고 간청했습니다.


신부님들은 어머니와 같은 애정으로 성경 말씀을 들려주면서 그들을 위로하였고, 자기들은 웃어른의 명령으로 죽음의 길로 간다고 타일렀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만류할 수 없게 되자 적어도 자기들도 신부님들을 따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로 애원하였으나, 그리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신부님들은 미사성제를 봉헌한 다음, 길을 떠나려고 일어나시어 마지막으로 자기 양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는 더는 목자들을 뵐 수 없게 되었음을 통곡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이 떠나자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고, 비록 몸은 함께 가지 못할지라도 마음은 신부님들과 결합하여 있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장차 닥쳐올 사태를 기다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포졸들은 신부님들을 보자 관례를 벗어나 부드럽게 대하였고, 아주 예의 바르게 대우했습니다. 관장들도 많은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아주 잘 대우하였고, 감시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으며, 어디를 가든지 허락하였습니다. 밤에도 포졸들이 신부님들을 매우 신임하여 마음 놓고 편안히 주무실 수 있도록 물러갔습니다. 그들은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하였고, 말에 태워 조심스럽게 끌고 갔습니다.

 

서울에 끌려온 신부님들은 존경하올 주교님을 뵙고 나서 모두가 같은 의금부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많이 받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감히 참아 견뎌냈고, 지극히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주 그리스도를 용감히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저버리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이에 놀라 큰 소리로 하느님을 증언하였고, 다른 신자들을 신고하라는 강요를 당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참을 수 없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형벌을 극복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1839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에 거룩한 피를 흘려 순교함으로써 하늘나라로 개선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도 신자들은 2년 동안 더 박해로 시달렸습니다.

 

마지막 박해가 4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신자들은 비참과 가난에 쪼들리고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게 되었으며, 박해뿐 아니라 무수한 재앙을 당했습니다. 4년 전부터 좀 멈추고 있지만 아직은 평온한 상태가 아닙니다. 


오늘날은 신자들이 실제로 박해를 당하고 있지 않고, 또 신자들을 살해하려고 수색하는 적극적 박해는 없지만, 신자들이 예전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포졸들은 신자들의 집이라는 혐의가 잡히기만 하면 즉시 그 집을 점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당한 끝에 맥이 빠지고 열성이 식어 대다수가 냉담 교우가 되었는데, 예전과 같은 열성과 상태로 돌았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진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점차 열성이 오르고 그 수도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배교자들은 참회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외교 인들에게 아무도 설교한 사람이 없지만 많은 사람이 그들의 오류를 버리고 가톨릭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되려고 하는 외교 인들이 많이 있으나, 신자들은 박해가 무서워서 자진하여 그들에게 종교를 전하려는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의 종교를 찬양하고, 그 종교가 참된 종교임을 고백하며, 박해가 없었더라면 그들도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로지 박해가 무서워서 감히 귀의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포졸들도 서로 다음과 같이 수군거립니다.

 

“만일 박해가 없다면 누구라도 송아지 새끼가 아닌 이상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마다할 사람은 없었을 거야.”

“천주교는 참으로 훌륭한 종교이기는 한데, 우리가 만일 신자가 되면 아무것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군. 온갖 모욕을 인내로 참아내고 언제 어디서나 겸손해야 한다네. 자기 자신과 세상 사물을 경시하며 모욕을 받더라도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네.” 

“그러니 비참할 거야. 세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일반적으로 외교인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정직하다고 알고 있고 신자들의 비참을 동정합니다. 박해 때에는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어떤 좋은 것이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면 ‘천주교인 소행’이라고 합니다. 


외교인들끼리도 어떤 것을 올바로 행하면 “자네도 천주교 신자인가. 그래서 바르게 행동하려는 건가?”라고들 합니다. 


중국인인 주문모(固文誤, 야고보)신부님을 죽인 왕후를 제외하고는, 조선에서는 종교를 적극적으로 박해한 임금님이 없었습니다. 모든 박해는 벽파의 대신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왕들은 흔히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벽파의 뜻을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허락하였을 따름이었습니다.

 

1838년에 대왕대비가 바로 그러하였고, 그다음 몇 해 동안의 마지막 박해 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대왕대비는 대신들의 뜻을 감히 반대하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반대하면서도 대신들이 신자들을 가혹하게 박해하고 신부님들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김 대비의 오라버니  김유근 이 살아 있었더라면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조선 안에 외국인 신부님들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신자 중 누구도 박해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비 신자이고 궁중의 2품 고관인 김정의 (추사 김정의 로 추정하는 인물)와 순교자 유 아우구스티노(유진길)와 아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마침내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는 평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1838년경에 중병을 앓고 정신을 잃었으며, 183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벽파들은 기회를 잡게 되었고 박해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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