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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열한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18 06:51 조회1,403회 댓글0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 10.9

 

여섯 번째 서한 

 1843. 1.15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일곱 번째 서한 

 1843. 2.16

 요동 백가점 

 리브와 

 미상

 

여덟 번째 서한 

 1844. 5.17

 소팔가자 

 리브와

 1844. 9.29

 

아홉 번째 서한 

 1844.12.15

 소팔가자

 페레올 

 미상 

 

 열 번째 서한 

 1845. 3.27

 서울 돌우물골 

 리브와 

 1845.10.14

 

 열한 번째 서한 

 1845. 4. 6

 서울 돌우물골 

 리브와

 미상

 

 


< 열한 번 째 서한 작성 배경>


김대건은 중국에 있을 때 일부 사람들이  모방, 샤스탕 신부가 포졸들에게 자수한 것에 대해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잘못된 것임을  열한 번째 서한에서 조목조목 설명하고 순교한 신부님들은 마치 죄없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유다에 의해서,  신부님 들은 배교한 신자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신부님들은 미사성제를 봉헌하시고

그리스도는 당신 양들을 위해,  신부님들도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의로 자신을 최고의 형벌 (죽음)에 내 맡겼다. 


그것은 과오가 아니라 덕행이었다


조선 조정이 세 선교사의 존재를 파악하고 신자들을 괴롭히며 체포하려 하자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스스로 자수하였다.  처음엔 모방, 샤스탕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려 했으나 두 신부님은 이미 자수한 주교님을 두고  조선을 떠날 의사가 없었으며  충청도에서 계속 전교 활동을 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계속되는 신자들의 박해를 걱정하며 두 신부님에게 자수하도록 권유하는 쪽지를 보냈다. 이에 따라 두 신부님은  포졸들에게 자수하게 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는 포졸들은  관례를 벗어나 예의 바르게 대우하였으며 말에 태워 조심스럽게 끌고 갔다고 한다.  


세 선교사는 의금부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들은 프랑스로 돌아가라, 배교 해라, 신자들을 밀고하라 등의 회유와 경고, 고문을 받았으나 모든 형벌을 극복하고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세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에도 신자들은 2년 동안 더 박해에 시달리며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신자들의 집이라는 혐의가 있으면 포졸들은 그 집을 빼았았기 때문에 배교하고 냉담하는 신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신자들의 열성이 점차 오르고 배교자들도 참회하는 등, 외교인들에게 아무도 천주교 교리를 설교할 사람이 없어도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받아 들였다. 


"천주교는 참으로 훌륭한 종교이기는 한데, 우리가 만일 신자가 되면 아무것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군, 온갖 모욕을 인내로 참아내고 언제 어디서나 겸손해야 한다네. 자기 자신과 세상 사물을 경시하며 모욕을 받더라도 보복을 해서는 안된다네" 

(김대건 서한집 124쪽)


외교인들에게는  천주교 신자들이 정직하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올바른 행동을 하면 "자네도 천주교 신자인가? 그래서 바르게 행동하는 건가?" 라고 들 했다


주문모 신부를 죽인 왕후(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를 제외하고는 조선에서는 적극적으로 종교를 박해한 임금이 없었다. 단지 왕들은 안동 김씨를 밀어 내고 세력을 잡은 풍양 조씨의 벽파 세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일 순원왕후(순조의 왕비)의 오라버니 김유근이 살아 있었다면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김유근은 순교자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친분이 두터워서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1838년경에  중풍에 걸려 1839년에 사망 함으로써 벽파들의 득세와 기해박해를 막을 수 없었다.   


김대건의 열한 번째 서한은 여기서 마치고 곧이어  열두 번째 서한에서  조선의 당파 싸움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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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선교사 순교 장면(출처 미상)




  <참고>

 

 주문모  야고버 신부  周文謨(1752∼1801)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외국인 신부. 

중국 소주 곤산 현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후 20세에 결혼 했는데 3년 만에 상처하고 혼자 살다가 장년에 이르러서 북경신학교에 들어 가 신부가 되었다. 

 

1794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윤유일과 지황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하여 서울 북촌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서 조선에서는 최초로 성사를 집전하였다. 


입국 후 6개월 동안 성직을 수행하다가  신입 교우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여주, 고산, 공주, 온양, 내포, 남포 등 지방을 순회하며 열성적으로 전교하였다. 

 

또한  정약종을 회장으로 하는 명도회 (교리 연구회)를 조직하고  황사영, 홍필주, 현계흠, 홍익만 등을 하부 조직으로 하는 육회 (六會)를 통해 교리 연구와 전교에 힘쓰게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 라는 교리 지침서를 저술하였고 강완숙을 회장으로 하여 여교우들의 신앙 활성화를 도모했으며  강완숙의 안내로 은언군(정조의 서자)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를  입교시켰다. 이러한  열성적인  노력으로 1801년 조선 교회 교우 수는 1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중국으로 피신하려고 황해도 황주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로 되돌아 와 4월 19일 의금부에 자수하고 5월 13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됨.  



 정순왕후 김씨 (1745-1805)


조선 21대 왕 영조의 계비. 

15세 나이에 66세인 영조의 왕후로 궁중에 들어 옴 .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46년 동안 국모의 지위에 있으면서 노론 벽파의 후원자 역활을 하였으며 사도세자의 죽음, 신유박해 등 큼지막한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22대 왕, 정조가 승하하고  23대 왕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신분으로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와는 달리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여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신유박해로 노론 벽파의 정적인 남인과 시파가 제거되었고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과 이승훈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용은 배교를 한 후 유배를 갔다. 그리고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에 의해 백서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순원왕후  김씨 (1789-1857)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왕비. 효명세자의 어머니이자 헌종의 할머니. 순조 사후에 손자 헌종의 수렴 청정을 하였고 헌종이 죽은 후엔 양자를 들여  철종으로 즉위케 한 다음 두번째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원왕후의 등장으로  안동 김씨 60년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 집안에는 천주교 신봉자가 다수 있었다.   그 때문에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장악한 동안에는  천주교 박해가  다소 완화 되었다.  


그러나  순조가 이들을 견제하는 방책으로  1819년 풍양 조씨  벽파 세력인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신정왕후)으로 맞아 들이자  풍양 조씨 벽파의 세력이 조금씩  커져 갔다.


순원왕후가 철종의 수렴청정을 끝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자 풍양 조씨 벽파 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두 당파  세력 간의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천주교에  적대적이지 않았던 안동 김씨 세력을  누른  풍양조씨 벽파 세력이  기해박해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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