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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열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14 09:17 조회1,416회 댓글1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 10.9

 

여섯 번째 서한 

 1843. 1.15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일곱 번째 서한 

 1843. 2.16

 요동 백가점 

 리브와 

 미상

 

여덟 번째 서한 

 1844. 5.17

 소팔가자 

 리브와

 1844. 9.29

 

아홉 번째 서한 

 1844.12.15

 소팔가자

 페레올 

 미상 

 

 열 번째 서한 

 1845. 3.27

 서울 돌우물골 

 리브와 

 1845.10.14

 

 

  

  ​< 열 번째 서한 작성 배경>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소팔가자에서 훈춘까지, 왕복 2,000리를 다녀 온 김대건은 동료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하여  1844년 12월 15일 부제품을 받았다. 


훈춘을 다녀온 결과 조선으로 선교사를 영입하려면  훈춘보다는 의주 변문 쪽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 하에 페레올 주교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과 함께 소팔가자를 떠나 1844년 12월 말에 봉황성 책문(중국 측 국경)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조선에서 온 밀사들은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기엔 어려움이 많다며 우선 김대건을 먼저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1845년  1월 1일 조선 교우 한 명과 같이 책문을 출발하도록 했다. 평양에 도착한  김대건은 현석문 가롤로와 이재의 토마스를 만났고 그들의 안내로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여  돌우물골(석정동) 교우 집으로 갔다. 


김대건은 박해의 위험을 피해 자신이 조선에 왔다는 것을 교우 몇 명에게만 알리고 어머니 고 우르술라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입국하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병에 걸려 보름 넘게 고생하였다. 


"이렇게 가련한 처지의 허약한 몸인데도 하느님의 도우심과 자비에 의지하여 페레올 주교님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접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서한집 116쪽 참고)


김대건은 육로를 통해 선교사를 영입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현석문 가롤로를 충청도에 보내 해변에 집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중국 강남성(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를 모셔올 생각으로 배를 한 척 구입하였으며 서울 돌우물골에 선교사들이 거주할 집도 한 채 마련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14세가 된 신학생 두 명을 교육하였고 현석문 등의 도움을 받아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과정을 리브와 신부께 편지로 전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몇 가지 물품과  천연두로 죽어가는 조선 아기들을 위한 처방도 알려 달라고 청하였다. 


<참고> 


현석문 가롤로(1797-1846)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현계흠의 아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현경련(성인품)의 동생.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5살 때 부친이 순교한 후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7년 샤스탕 신부가 입국했을 때  그의 복사가 되어 각지를 다니며 전교했으며 1839년 기해박해로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교우 회장이 되어 성직자 없는 조선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순교자들의 기록을 수집 ,정리하여 '기해일기(己亥日記)를 편찬하였다.  또한 박해 받는 교우들을 찾아 다니며 위로 격려하는 한편 중국 교회와도 긴밀한 연락을 하였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입국한 지 얼마 안되어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7월 11일 정철염, 이간난, 김임이, 우술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9월 19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  1925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시성됨 



이재의 토마스(1785-1868)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의 손자.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 정하상 바오로와 반년 가까이 동거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앵베르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앵베르 주교가 순교할 때까지 복사로 일하였다. 


김대건 부제가 입국할 때 의주 변문에서 그를 영접하여  서울로 인도하였고  상해로 가는 뱃길에 동행하였으며 상해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교리를 더욱 깊이 연구하였고 페레올 주교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로 피난하여 화를 면했으나 1846년 체포되었을 때에는 배교를 하여 석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1868년 4월 3일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신부를  국내로 인도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5월 8일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봉황성 : 중국 요녕성 단동 시에서  동북쪽으로  약 40Km에 위치.

          중국과 조선 사이의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책문이 있다.

          


책문(冊門) 과 변문(邊門)

책문은 중국과 조선 사이에 목책을 세우고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지나는 세관 같은 역활을 하던 곳으로  발해만에서 시작해 내륙으로 2,000리 뻗어 있던 목책 울타리에는 70 여 개의 책문이 있었는데 그 중 평안북도 의주 쪽에 있는 책문의 하나를  조선 쪽에서는 변문이라고 하였다.  


조선 쪽 책문 즉, 변문에는 의주의 관리들이 파견되어 상주해 있었고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을 가려면 이 곳을 지나야만 했다. 


조선 쪽에서 중국 쪽 책문까지는 120여리가 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완충지대였다. 현재 책문은 중국 문화 대혁명 때 다 철거되어 남아 있지 않다. 



돌우물골 (석정동) : 

중구 을지로1가 ,소공동, 태평로 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돌 틈에서 물이 솟는 우물이 있던 마을 이름이 유래, 

김대건은  지금의 소공동 조선 호텔 바로 옆에 있었던 초가집을 마련했다

 


   <열 번 째 서한 전문>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님께

서울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신부님이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작년에 지극히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을 모시고 몽골에서 출발하여 변문까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조선에서 온 신자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교님께 담당 선교지인 조선에 입국하는 데는 여러 가지 난관이 많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저를 먼저 조선에 파견하시어 제가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고, 가능성 유무에 따라 주교님의 입국을 주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페레올 주교님의 강복을 받고 한밤중에 신자들을 따라 출발하여, 해 질 무렵에 의주 읍내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이르러 연락원들에게 어떠어떠한 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약속을 하고서 연락원들을 먼저 앞세워 보내고 저는 홀로 의주에서 한 20리가량 떨어진 아주 은밀한 산골짜기를 찾아들어 울창한 숲속의 어두침침한 나뭇가지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눈이 사방에 깊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니 너무나 지루하여 묵주 기도를 수없이 거듭하였습니다. 해가 지고 천지가 어둠에 잠겼을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곳을 떠나 읍내를 향해 가는데, 발소리마저 없게 하려고 신발을 벗고 걸어갔습니다. 강들을 건너고 길도 아닌 험한 곳을 달려갔습니다. 어떤 곳은 눈이 바람에 불려 다섯 자 혹은 열 자나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제가 겨우 약속하였던 곳에 이르러서 보니, 신자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걱정되고 근심이 되어 두 번이나 읍내로 들어가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헛일이었습니다. 결국, 약속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어떤 밭에 앉아 있자니까, 처량한 생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여 몹시 심란해졌습니다. 연락원들이 잡힌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여기러 오지 못하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락원들이 절실히 필요한 이때에 저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여 서울로 가자니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여비도 없고 옷도 없고, 그렇다고 중국으로 되돌아가자니 그것 역시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더구나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모셔올 길이 아주 끊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등등의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와 근심에 억눌려 기진맥진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거름더미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고대하면서 먼동이 틀 때까지 녹초가 된 채 있었습니다.

 

이때 마침 저를 찾아다니는 신자들이 그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저보다 먼저 약속한 이곳에 왔었는데, 저를 만나지 못하자 되돌아갔다가 두 번째로 다시 여기 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얼마 동안 기다려도 제가 오지를 않으니 모두 걱정을 하면서 5리쯤이나 나가서 찾아보아도 저를 찾지 못하여 근심으로 밤을 새우고, 저의 도착에 대해 절망하고 낙심하여 자기들 집으로 돌아갈까 하던 참에 저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7명의 신자가 말 두 필을 끌고 서울을 떠났는데, 중간에 오다가 4명은 신부님들을 영접하는 어려움과 위험 때문에 낙심하여 뒤에 떨어지고 세 명의 신자만 변문까지 왔던 것입니다. 현 가롤로(현석문) 와 이 토마스(李在誼) 와 두 명의 하인은 끝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뜬 뒤에 신자 두 사람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뒤따라오도록 남겨 두고 저는 신자 한 명만 데리고 의주를 떠났습니다. 저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30리를 겨우 걸은 다음 주막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말 두 필을 세내어 타고 길을 떠나 닷새 만에 평양(平壞)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말 두 필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를 만났습니다. 모두 함께 길을 떠나 7일 만에 수도 서울 즉 한양에 도착하여 신자들이 마련해 둔 집(즉 돌우물골)에 들어갔습니다.

 

신자들의 호기심과 말조심이 없는 수다스러움과 위험을 염려하여 필요한 신자 몇 명 외에는 아무에게도 저의 귀국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조선에 돌아왔다는 말을 저의 어머님(즉 고 우르술라)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엄중히 당부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미 우리가 마카오로 간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우리가 귀국하는 대로 즉시 잡아 죽이게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안에 갇혀 있은 지 며칠이 지나니까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저를 괴롭히더니 마침내 병에 걸렸습니다. 마치 오장육부가 끊어지듯이 가슴과 배와 허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히 아팠습니다. 때때로 심하게 아프다가 좀 낫기도 하고, 이렇게 한 보름 넘게 앓았습니다. 저는 병을 고치기 위하여 신자 의원과 외교인 의원을 청하여 그들이 주는 여러 가지 약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병은 다 나았으나 몸이 허약하여 글씨를 쓸 수도 없고 다른 것을 원하는 대로 행할 수도 없습니다. 한 20일 전부터는 눈병까지 생겨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련한 처지의 허약한 몸인데도 하느님의 도우심과 자비에 의지하여 페레올 주교님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접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석문)가롤로를 충청도로 보내어 해변에 집을 마련하라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집 한 채와 배 한 척을 샀는데, 그 값이 은 146냥이었습니다.

 

이제 중국 강남 성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참입니다. 그러나 신자 뱃사공들에게는 미리 겁에 질릴까 염려되어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자들이기는 하지만 매우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먼바다에 나가 본 적이 없고, 대부분은 배를 조종할 줄 모르며, 다만 제가 항해술이 능통한 자로 그들을 설득시켰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중국과 조선의 두 나라 사이에 약조한 것이 있습니다. 즉 조선 배가 국경을 넘어 중국 해변에 들어가면 중국에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잡아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는데, 만일 조사해 보고 죄가 있음이 발각되는 경우에는 죽이게 되어있고, 또 중국 배에 대해서도 조선에 오면 그렇게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 대한 경의와 인자하심을 기억하시는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가 무사히 강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게 해주실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스승님께 몇 가지 청할 것이 있는데, 혹 저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시면 컴퍼스, 철필(잉크 없이 글씨를 쓸 수 있는 검은 철심이 든 필기구), 세계 지도 특히 황해와 중국과 조선의 해변을 자세히 그린 지도, 그리고 눈을 보호하는 중국식 녹색 안경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지극히 공경하올 사부님께 무익하고 지극히 부당한 종 김해 김 안드레아 올립니다.

 

추신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 부문 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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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님의 댓글

나무 작성일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조카.
부친 정약종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학문을 계승하여  서학(西學)을 연구하고,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하였다.

정하상은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 세실리아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哲祥)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 (경기도 양주군 능내리) 큰댁으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단신 상경, 교우 조증이(바르바라) 집에 의지하며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 가 있는 조동섬 유스티노를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서울로 귀환하여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종횡의 활동을 펴게 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인해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주문모 신부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 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주교를 상대로 성직자영입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 가롤로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하였다. 정하상은 북경주교에게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아홉 차례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에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으로 북경과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 가롤로를  밀사로 북경 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하였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은 마침내 세계교회로까지 확대된다. 즉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 거두기가 어렵자  정하상은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인 교황에게 청원하기로 하였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 후 대교황청원문을 올렸다.

 이 청원문은 북경 주교의 동정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포교성성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가기로 자원하자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되었음)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정하상의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다.

즉 1834년말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 신부, 1836년에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교회가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로의 교회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몸바쳐 일하였다.

셋째,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자가 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가 베트남의 베리트(Beryte) 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 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인 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 장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써 박해자에게 천주교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의 글이나 가장 요령 있게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로 정하상은 생명의 극을 다하여 순교함으로써 천주의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실증하였다.   그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두 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세 분 순교자는 1925년에 복자로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
(가톨릭 대서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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