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성당사무실
화~금 09:00 ~ 18:00
토요일 09:00 ~ 18:00 미사 후
주일 06:30 ~ 19:00 미사 후
T. 02.2203.6161  
F. 02.2203.7171

점심시간
평   일           12:00 ~ 13:00
토요일           12:00 ~ 13:30
주   일           12:30 ~ 14:30
(월요일,  법정공휴일 휴무)
자유게시판

김대건 여덟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11 13:32 조회1,521회 댓글0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 10.9

 

 ​여섯 번째 서한 

 1843. 1.15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일곱 번째 서한 

 1843. 2.16

 요동 백가점 

 리브와 

 미상

 

 여덟 번째 서한 

 1844.  5. 17

 소팔가자 

 리브와

 1844. 9.29

 

 

  


<여덟 번째 서한 작성 배경>

 

기해박해로 선교사 3명을 잃은 조선이  목자 없는 양떼처럼 암울하다고  생각한 김대건은 혼자 의주 변문을 통과해 조선 잠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8431월 백가점으로 돌아 와 김 프란치스코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 3월에는 메스트르 신부님의 분부에 따라 중국 측 국경인 책문에서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의 소식을 받아 왔고 4월에는 소팔가자小八家子(지도 참고)로 거처를 옮기는데 소팔가자에는 이미 최양업이 머물고 있어서 이 두 사람은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소팔가자는 여덟 가정으로 시작된 마을이란 유래가 있는 곳으로 길림성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약75리 떨어져 있고 1796년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하나 둘 교우들이 모여 제법 큰 교우촌이 형성되자  초대 몽골 대목구장인 베롤 주교가 1841년 성당을 건립하면서  소팔가자는 조선 선교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18439월 김대건은 책문으로 가서 김 프란치스코와 한 번 더 만났으며  1231일에는 개주의 양관에서 있었던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84425일에는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북방을 통한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고자 훈춘(지도 참고)으로 가서 38일 조선에 입국하였고 4월에 함경도 경원에서 조선 교우를 만난 뒤 다시 소팔가자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1215일 김대건과 최양업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삭발례와 부제품을 받게 된다

 d8fc9f4db79a2fdf03e2a792a207a504_1628652

 

  < 여덟 번째 서한 전문>


예수마리아 요셉

리브와 신부님께

(소팔가자에서),1844년 5월 17일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5월 15일부로 신부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작년 음력 3월과 9월 경에 장상(메스트르 신부)의 분부대로 저는 다시 변문으로 가서 조선에서 보내온 소식을 받아 왔습니다.

 

조선에 있는 신자들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으나 목자들이 계시지 않아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해자인 대비 ( 순조의 왕비, 순원 왕후)는 아직 생존해 있고 왕(즉 헌종)은 정신병에 걸려 때때로 정신 착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지금 계획으로는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어떤 신자 가족을 의주(儀州)로 이사하게 하여 조선에 입국할 사람이 조금 더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해볼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날마다 입국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지극히 공경하올 페레올(J. Ferreol, 高)주교님과 함께 몽골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2월 5일에 저는 공경하올 주교님의 사명을 받들어 북방을 통한 조선 입국의 길을 탐색하고자 약 두 달 동안 큰 장애 없이 모든 여정을 답사하고 돌아왔습니다.

 

만주어로 훈춘이라고 불리는 홍시개 촌락은 우리가 체류하고 있는 팔가자에서 2천 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훈춘과 영고탑(奉古塔: 흑룡강성 영안시)사이에 5백 리나 뻗어 있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 합니다. 


이 사막에는 여관이 전혀 없는데 유목민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체류하면서 나그네들을 자기 움막에 유숙하게 합니다. 훈춘에서부터 조선 사람들의 도시들과 집들을 볼 수 있는데, 교역이 열리는 기간 외에는 일체의 교섭이 인정되지 아니합니다.

 

훈춘에서  8일을 묵고 안내자와 함께 조선인 도시(함경도 경원)로 가서 거기에서 조선인 연락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선교사 신부님의 도착을 기다리며 한 달 이상을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의 서한에서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을 보시게 될 것이므로 저는 존경하올 스승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존경하올 스승님! 만일 가능하시다면 성경책과 영신 수련을 위한 매일 묵상책, 그리고 보목(진품 십자가 조각), 상본, 특히 성모님의 무염시태 상본과 십자고상과 묵주, 그리고 깃털 펜을 깎는 칼도 함께 보내주시기를 청합니다.

 

토마스는 이번에는 스승님께 편지를 올리지 못하며 엎드려 인사드립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지극히 겸손하고 부당한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참고>

 

페레올 주교  Ferreol, Jean Joseph(18081853).

조선 제3대 교구장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나 1838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된 후 1840년 마카오로 파견되었다. 그 후 중국 대륙을 횡단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에 도착하였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 봉천까지 왔으나 요동 지방의 푸대접 때문에 서만자로 되돌아 갔다.

 

요동 지방은 원래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 구역이었다가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관할이 되었는데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그곳 교우들에게 프랑스 선교사들을 받아 들이지 말라고 사주했기 때문에  푸대접이 일어났다.

 

서만자로 되돌아 온 페레올 신부는 1843년 만주 교구 베롤 주교로부터 주교품에 올랐다. 그러나 조선 입국이 여의치 않던 중 때마침 찾아 온 김대건을 먼저 조선 입국 시키기로 하고 마카오로 돌아갔다

 

갖은 고생 끝에 조선 입국에 성공한 김대건이 배를 구입하여 상해로 왔는데 거기에서 페레올 주교, 다뷜리 신부 등 세 사람은 서해를 건너 와서 충청도 나바위에 상륙하게 된다.(18451012)

 

페레올 주교는 서울로 올라 와 전교 활동을 하던 중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거듭된 박해와 과중한 업무 속에서 건강을 잃게 되어 185323일 선종하였다. 그는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서 폐허가 되다시피한 조선 교회를 소생시키는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유해는 안성 미리내 성지 김대건 신부 옆에 안장되었다.  (가톨릭 대사전 참고)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소서울시 송파구 신천동 11-2 천주교 신천동 성당 TEL02-2203-6161 FAX02-2203-7171

Copyright © Sincheon Catholic Church 2014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