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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일곱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09 08:53 조회1,521회 댓글0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 10.9

 

 ​여섯 번째 서한 

 1843. 1.15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일곱 번째 서한 

 1843. 2.16

 요동 백가점 

 리브와 

 미상

 

 

  


​<일곱 번째 서한 작성 배경>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는 일곱 번째 편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 와는 수취인이 다를 뿐 중복된 내용이다. 다만 편지 서두에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가 8년 전, 김대건이 마카오로 유학 올 때 서로 만났던 일이 있었다는 내용이 추가 되어 있다.


김대건은 갖은 노력 끝에 조선으로 영입했던 선교사들이 기해박해 때 모두 순교하여 마치 목자 없는 양떼가 된 조선교회에 대해 안타까운 탄식을 한다. 그래서 다시 신부님들을 조선으로 모셔갈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지만 김 프란치스코는 지금으로선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결국 김대건은 혼자서라도 조선 입국을 감행하려 마음 먹고 통행증 없이도 의주 변문을 통과하는 기지를 발휘해서  의주 성곽까지 도착했으나 길도 없는 험악한 곳을 헤매다가 신변상 위험을 느끼고서는  닷새 만에 백가점 메스트르 신부에게로 되돌아 왔다(1843년 1월 6일) 


편지의 끝 부분에 김 프란치스코를 기다리며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고 하였는데, 1843년 3월 중국 쪽 국경 관문인 책문으로 가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김프란치스코를 다시 만나고 4월에는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최양업과 함께 신학공부를 하게 되는 내용이 여덟 번째 편지에 이어지게 된다. 


또 조선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 온 편지가 물리(J.M Mouly) 신부에게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물리 신부는 라자리스트 수도회 선교사로  당시 몽골 대목구장이었다. 


김대건은 편지를 쓸 때 마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께'로 시작하고 편지 말미에는 '공경하올 사부님께 순명하는 아들'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스승 신부님을 하늘 같은 아버지로 존경하고 순명하였음을 느끼게 된다.  




   


<일곱 번째 서한 전문>


예수마리 아 요셉

리브와 신부님께

요동(백가점)에서,1843년 2월 16일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먼저 써 놓은 편지를 아직 보내지 못하였으므로 새로 들은 소식을 추가하여 동봉합니다. 12월 23일에 메스트르 신부님이 안배하신 대로 나흘이 걸려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온 연락원 김 프란치스코는 벌써 변문에 도착하여 여러 날을 머무르면서 우리와의 상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인 안내자들이 오지 않은 줄 알고, 외교인 친구들의 호의와 후원으로 그들을 수행하여 중국에 들어갈 허가를 얻어, 북경으로 들어가는 일행 명단에 올라서 조선 임금님이 보내는 사신들과 함께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변문에서 멀지 않은 길거리에서 사신 일행과 함께 가는 그를 만났으나,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8년 전에 단 한 번 서로 만나 본 일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에게 교우냐고 물었더니, 그가 자기는 교우이며 세례명은 김 프란치스코라고 대답하였으므로 저도 그에게 비슷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게 북경행을 중지하고 변문으로 되돌아가서, 선교사 신부님을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인도해 드릴 방도를 의논하자고 청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면 외교인 동료들이 수상하게 여길 것이고, 따라서 박해의 위험이 없지 않으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장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이 온 중국인 안내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면서 우선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 보면 신부님들은 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를 위하여 살해되었고, 거의 200여 명이나 되는 신자들도 살해되었는데, 그들 중 다수가 지도급 신자였다고 합니다.

 

저의 형제 토마스(최양업)의 부모도 살해되었는데, 부친(최경환)은 곤장으로, 모친(이성례)은 칼을 받아 두 분 다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 역시 많은 고난을 겪고 부친(김제준)은 참수되었고, 모친(고 우르술라)은 의탁할 곳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 집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프란치스코가 저에게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으나 여기에 다 기록하기에는 너무 장황할 것 같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앵베르 주교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배반자와 포졸들의 수색을 받으시어 수원이라는 곳에 은신하셨는데, 유다가 지옥의 심부름꾼들을 거느리고 그곳에 당도하자, 주교님은 쉽사리 더 피신할 수 없음을 아시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아가 재판소로 끌려가셨다 합니다.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전멸될 것이라는 말을 주교님이 들으시고, 편지를 보내 두 분 신부님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다 같이 한 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오!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로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다 삼켜 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요새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고 있지만, 신부님들이 계시지 않아 마치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답니다. 

 

근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주요한 배반자가 된 김여상은 사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사형 이유는 흉악한 인간으로서 남들을 공적으로 해친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는 듯합니다. 역사를 보아도 이따위 인물은 사형을 받고 매도당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 하나는 자기 아내의 부모를 신고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교살당했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많은 신자를 체포한 포도대장도 짐작하건대 남에게 불의한 짓을 저지른 탓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후 사형을 받았다는 말들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그에게, 어째서 여러 해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I839년)에는 배반자들의 음모 때문에 감히 보내지 못하였고, 이어 밀사들을 보냈으나 도중에 사망하였고, 두 번째 보낸 자는 변문까지 가기는 했으나 중국인 안내자를 아무도 만나지 못해서 그대로 되돌아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프란치스코가 변문에 와서 중국인 안내자를 아무도 만나지 못해서, 자기가 북경까지 들어갈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 상황이 허락지 않아 그 밖의 소식을 더 오래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쯤 듣고 나서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받고 그라 작별한 후, 변문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지냈습니다.

 

저는 신부님들이 1년 후에나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2월 쯤에 신부님을 인도할 준비를 할 마음으로, 제가 곧 조선에 들어가는 여행을 계속하려 하였습니다. 제가 프란치스코에게 조선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지극히 어렵다기보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하면서,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만 입국할 수 있을듯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튿날 밤 1시쯤 일어나서 전에 준비해 두었던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중국인 안내자들과 작별한 뒤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얼마 안 가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몰라 숲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무슨 짐승이 가까이 오기에 생각하니, 나무할 칼을 잊어버리고 변문에게 놓고 왔기에 변문으로 되돌아가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130리 되는 길을 걸어가니,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멀리 보였습니다. 과연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 님의 보호하심에 의지하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성문에는 군인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통행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 지나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군인이 저에게 통행권을 요구하려는 차례가 되자 세관원들한테로 갔습니다. 저는 요행히 몸집이 큰 소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관에서는 여행자들에게 한 명씩 세관장 앞으로 나와 성명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웠으므로 불을 켜놓고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관장 외에도 다른 세관원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서서, 혹시 누가 달아나는가 하여 두루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미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기에 저는 슬그머니 그들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저의 등 뒤에서 세관원이 저를 부르며 통행증도 내지 않고 가느냐고 호령하기에, 저는 귀먹은 체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연거푸 저를 부르기에 “무슨 말씀이 오. 통행증은 벌써 내드렸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이 저를 뒤쫓아 오는 줄 알고 달아나 성 밖의 변두리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저를 맞아 줄 집이 한 채도 없었으므로 대략 1백 리가량을 밤새도록 걸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조그마한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 안에는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제 얼굴과 의복을 살펴보고, 또 말소리를 들어 보고는 외국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진상을 알아보려고 제 머리름 살펴보고, 제가 신은 중국 버선을 검사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저를 동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반대하여 제가 어디로 가든지 잡히리라고 떠벌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백하고 또 조선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저의 근본이 변할 리 없다고 대답하고, 비록 잡힌다고 할지라도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마음은 편안하다고 대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 저를 집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듣고 제가 조선의 수도 서울 즉 한양으로 가는 줄 알고 간교하게도 뒤로 사람을 보내서 제가 가는 방향을 정탐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포졸들의 손아귀를 피하기가 지극히 어려웠고, 만일 잡히면 제 몸에 지닌 돈만 보더라도 도적의 혐의를 받아 사형을 받게 될 염려가 있었습니다. 도적은 국법으로 모두 다 사형에 처하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정탐꾼이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서 그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로 서울 쪽으로 가더라고 설득시켰다고 생각하고, 그 조그마한 주막을 멀리 피하면서 우회하여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는 감히 길에 나서지를 못하고, 수목이 무성한 산속에 숨었다가, 해가 떨어져 어둠이 땅을 내리 덮었을 때, 걸음을 재촉하여 밤 2시쯤 의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바다와 반대쪽에 있는 읍의 왼편으로 방향을 정하여, 길도 없는 험악한 곳을 헤매었습니다. 이런 곳에도 사방에 지붕들이 보이기에 저는 국경 수비대로 여겼습니다.

 

제가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해가 떠올라 사방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을 건넌 뒤에 황막한 들길을 걸었습니다. 여기는 낮 동안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도중에 중국 옷으로 갈아입느라고 나머지 한나절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약 1백 리 길을 걷고 나니 해가 떠올랐습니다. 계속 길을 걸어 저녁때가 지나 변문에게 도착하여 모든 사람이 비웃는 가운데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과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 몇 가지 물건들을 마련하고 5일 만에 백가점에 도착하여 공경하올 메스트르 신부님에게로 돌아왔는데, 이날이 1월 6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3월에 프란치스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사정은 신부님들의 편지를 보시면 더 자세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조선의 주요한 사람들이 편지를 보냈는데, 제 짐작에 그 편지를 신부님 앞으로 보냈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물리(Mouly)신부님께로 보내졌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순명 하는 아들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참고>


앵베르 주교 : 한국명  범세형   Imbert, Laurent Marie Joseph (1796∼1839)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조선교구 제 1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갑자기 선종하자 교황청은 중국 사천교구에서 선교하던 앵베르 신부를   1837년 5월 14일 제2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조선에 잠입하였고  이로써 조선 교구는 이미 조선에서 활동 중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함께  교회 조직을 갖추게 되었으며 1839년 초에 신자 수가 9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앵베르 주교가 조선 신자들을 위해 번역하여 만든 <천주성교공과> 라는 기도서는 박해 시절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제2차 공의회  기도서 개혁 때까지 140 여년 동안 사용되어 왔다.   


또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고  정하상 바오로  등 네 명의 성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빠른 시일 내에 사제로 양성하려 하는 등 열성적으로 사목하였으나  1839년 기해박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교우들에 대한 박해와 고문이 격렬해지자 앵베르 주교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스스로 포졸들에게 자수하였으며 모방, 샤스탕 신부는 중국으로 피신하도록 권유했지만 그들 역시 자수하여 결국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앵베르. 모방, 샤스탕은 1925년 시복되었고 1984년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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