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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여섯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05 20:46 조회1,569회 댓글0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 10.9

 

 ​여섯 번째   서한 

 1843. 1. 15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 27

 

 

 

<여섯 번째 서한  작성 배경> 


김대건은 1842년 12월 23일 연락원 2명과 백가점을 떠나 3일 후에 변문에 도착하였다. 그는 변문 인근에서 청나라로 가는 조선 임금의 사신 일행을 보았는데 그들 중에서 김프란치스코라는 밀사를 만났다. 


김대건은 그에게서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가 참수되고 이 백여 신자들도 사형을 받았으며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곤장으로,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참수되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는 참수되었고 모친 고 우르술라는 의탁할 곳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의 집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닌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김대건이 이같은 슬픈 소식을 듣고도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에 슬픔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스승 신부님들이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선교 의지를 옆에서 보고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김대건은 기해박해로 세 분의 성직자를 잃어 목자없는 양떼가 된  교우들을 생각하며 메스트르  신부의 조선 입국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김 프란치스코는 박해의 위험이 있으니 더 기다리라고 하면서 앵베르 주교가 투옥 되기 전까지 쓴 보고서와 모방 신부의 보고서, 모방과 샤스탕 신부의 편지를 건네 받은 후 그와 헤어졌다. 


변문으로 돌아 온 김대건은 하루를 보낸 후 이튿날 홀로 조선에 입국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는 선교사들은 1년 후에나 조선에 입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앞서 2월 쯤 메스트르 신부를 조선으로 인도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국을 시도했던 것이다. 


기지를 발휘해서 조선의 의주 변문은 통과했지만 안내자 없이는 서울에 갈 수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김대건은 압록강을 건너  1843년 1월 6일 백가점 메스트르 신부에게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연락원 김프란치스코가 오기를 기다리며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여섯 번째 편지를 보냈다. 




<여섯 번째 편지 전문>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요동(백가점)에서,1843년 1월 15일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저는 계획한 대로 12월 23일에 떠나 나흘 후에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변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다가 길에서 아주 큰 무리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선 임금님의 사신 일행을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그 일행 중에 김(金)프란치스코 라는 조선의 연락원이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저도 그를 몰랐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제가 그에게 신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온 중국인 안내자들을 멀찍이 뒤따라오게 하고, 그를 따라가면서 우선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 보니, 신부님들은 종교의 이유로 살해되었고,200여 명의 신자도 사형되었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지도급 인사였다고 합니다.

 

저의 형제 토마스(최양업)의 부모도 살해되었는데,부친(최경환 프란치스코)은 곤장으로, 모친(이성례 마리아)은 칼을 받아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 부모 역시 많은 고난을 겪고 부친(김제준 이냐시오)은 참수되셨고, 모친(고 우르술라)은 의탁할 곳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의 집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신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프란치스코가 저에게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으나 여기에다 기록하기에는 너무 장황할 것 같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앵베르)주교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배신자와 포졸들의 수색을 받으시어 수원(水原)이라는 곳에 은신 하셨는데, 유다(김여상)가 지옥의 심부름꾼들을 거느리고 그곳에 당도하자, 주교님은 쉽사리 더 피신할 수 없음을 아시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아가 재판소로 끌려가셨다고 합니다. 주교님은(모방,샤스탕)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전멸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시고, 서한을 보내 두 분의 신부님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다 같이 한 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오!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에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이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 만이라도 남겨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다 삼켜 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요새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고는 있지만, 신부님들이 계시지 않아 마치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답니다.

 

근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주요한 배반자가 된 김여상은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의 사형 이유는 그가 흉악한 인간으로서 남들을 공적으로 해친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는 듯합니다. 역사를 보아도 이따위 인물은 사형을 받고 매도 당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 하나는 자기 아내의 부모(장인과 장모)를 신고하여 국법에 따라 교살당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많은 신자를 체포한 포도대장도 짐작하건대 남에게 불의한 짓을 저지른 탓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후 사형을 받았다는 말들을 합니다. 주변 상황이 허락지 않아서 그 밖의 소식을 더 오래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을 인도하기 위하여 변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외교인들의 의혹과 박해의 위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외교인 친구들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중국에 들어가 북경까지 갈 수 있는 허락을 얻어서 사신들의 일행 중의 명단에 올라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저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신부님의 입국에 대하여 다른 신자들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다 하도록 전력을 쏟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님들이 1년 후에나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2월쯤에 신부님을 인도할 준비를 할 마음으로 제가 곧 조선에 들어가는 여행을 계속할 채비가 되어있음을 그에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누구든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잘라 말하면서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만 입국할 수 있을듯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쯤 듣고 나서 그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받고 그와 작별한 후 변문(즉 책문)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지냈습니다. 이튿날 밤 1시쯤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중국인 안내자들과 작별한 뒤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멀리 보였습니다. 과연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마음을 졸아들게 하였습니다.

 

특히, 나무할 칼을 잊어버리고 변문에게 놓고 왔기 때문에 더욱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 님의 보호하심에 의지하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성문에는 군인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통행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 지나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군인이 저에게 통행증을 요구하려는 차례가 되자 세관원들한테로 갔습니다. 저는 요행히 몸집이 큰 소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관에서는 여행자들에게 한 명씩 세관장 앞으로 나와 성명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웠으므로 불을 켜놓고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관장 외에도 다른 세관원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서서, 아무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두루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편에서는 먼저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기에 저는 슬그머니 그들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저의 등 뒤에서 세관원이 저를 부르며 통행증도 내지 않고 가느냐고 호령하였습니다. 그가 연거푸 저를 부르기에 저는 통행증을 벌써 내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저를 뒤쫓아 오는 줄 알고 달아나 성 밖의 변두리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저를 맞아 줄 집이 한 채도 없었으므로 대략 1백 리가량을 밤새도록 걸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조그마한 주막에 들어갔더니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얼굴과 의복을 살펴보고, 또 말소리를 들어 보고는 외국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제 머리를 살펴보고 제가 신은 중국 버선을 검사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저를 동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반대하여 제가 어디로 가든지 잡힐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백하고 또 조선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저의 근본이 변할 리 없다고 대답하고, 또 혹시 제가 잡힌다고 할지라도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제 마음은 편안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 저를 내쫓았습니다. 

 

제가 조선의 수도 서울 즉 한양으로 간다고 하였기에 그들은 그런 줄 알고 간교하게도 사람 하나를 보내어 제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포졸들의 손아귀를 피할 확신이 없었고, 만일 잡힐 경우에는 제 몸에 지닌 돈만 보더라도 도적의 혐의를 받고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도적은 국법으로 모두 다 사형에 처하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정탐꾼이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서 그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로 서울 쪽으로 가더라고 설득시켰다고 생각하고, 그 조그마한 주막을 멀리 피하면서 우회하여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는 감히 길에 나서지를 못하고, 수목이 무성한 산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땅을 내리덮었을 때, 걸음을 재촉하여 밤 2시쯤 의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바다와 반대쪽 즉 읍의 왼편으로 방향을 정하여, 길도 없는 험악한 곳을 헤매었습니다. 이런 곳에도 사방에 집들이 보이기에 저는 국경 수비대 막사로 여겼습니다.

 

제가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해가 떠올라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을 건넌 뒤에 황막한 들길을 걸었습니다. 여기는 낮 동안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도중에 중국 의복으로 갈아입느라고 나머지 한나절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약 1백 리 길을 걷고 나니 해가 떠올랐습니다. 계속 길을 걸어 저녁때가 지나 변문에게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물건들을 마련하고 5일 만에 백가점에 도착하여 공경하올 메스트르 신부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3월에 프란치스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공경하올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사부님께 순명 하는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참고>


<김제준 이냐시오> (1796-1839)  김대건의 아버지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나 조부 김진후와 백부의 권면으로 입교.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 골배마실로 이사하여 살던 중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교우촌 회장으로 활약하며 아들 김대건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기해박해 때 거짓 신자 김순성의 밀고로 관가에 끌려 가 김대건을 유학 보낸 것이 드러나 모진 고문과 형벌을 받자 한 때 배교하였지만  다시 신앙을 지켜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형장에서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1984년 시성됨.  


<고 우르술라>( 1798-1864) 김대건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는 김제준과 혼인한 후 남편의 공소 회장 일을 옆에서 돕고  15세의 아들 김대건이 마카오로 유학 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기해박해 때  거짓 신자 김순성의 사주를 받은 사위의 밀고로 남편 김제준이 순교하자 어린 아들 (김난식 : 김대건의 동생)을 데리고 신자들의 집을 돌면서 문전걸식으로 살았다.  


김대건이 신학생 신분으로 조선에 입국했을 때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겠으나 위험할 거 같아 자제하였고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0월 12일 강경 부근으로 입국하여 서울, 용인을 중심으로 사목 하던 중, 은이공소에서 비로소  서로 만날 수 있었다. 


1846년 부활절을 김대건 신부와 함께 보냈지만 선교사 영입로를 개척하러 연평도 쪽으로 갔던 김대건 신부가  6월 5일 체포되었고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는 과정을 고 우르술라는 지켜 보아야 했다.  고 우르술라는  작은 아들 김난식에게 의지하며 살다가 66세인 1864년에 죽어 김대건 신부 묘 곁에 묻혔다.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  최양업의 아버지 

조선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으로 이존창의 후손인 이성례 마리아와 결혼한 뒤 교우들이 많이 사는 서울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외교인들의 탄압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하고 교우촌을 형성하여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으며  큰아들 최양업은 모방 신부에 의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1839년 회장에 임명되면서 곧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고 불안해 하는 교우들을 위로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은 형벌과 고문을 받다가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대를 맞고 그 이튿날 순교하였다. 1984년 시성됨.  


<이성례 마리아> (1800-1840) 최경환의 아내, 최양업의 어머니 

18세에 최경환과 결혼한 후 남편을 도와 신앙생활을 하였다.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 잠시 배교를 했다. 최양업을 제외한 5형제,  특히 체포될 당시에 젖먹이였던 막내 아들에 대한 모정으로 배교를 택했으나 큰아들 최양업이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형조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 갇혀 있던 신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배교를 취소하였다. 

어머니의 참수형이 결정 된 후 어린 자식들은 걸식하여 모은 돈을 망나니에게 주며 단칼에 목이 베이도록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840년 1월 31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 순교함. 1984년 시복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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