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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다섯 번째 서한 살펴 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03 15:16 조회1,655회 댓글0건

본문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 2. 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9

 요동 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다섯 번째 서한 

 1942. 12.21

 요동 백가점

 리브와 

 1843.10.9

 

 

 

<다섯 번째 서한  작성 배경>


다섯 번째 편지는 네 번째 편지 앞 부분에 있는 대만, 오송구 등의 풍경과 보은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그 다음 내용은 네 번째 편지와 거의 중복된 것이다. 


네 번째 편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김대건, 최양업, 메스트르 신부, 브뤼니에르 신부 일행은 에리곤 호를 타고 조선으로 가려고 했으나 에리곤 호가 출항을 포기하는 바람에  남경교구장 베시 주교가 마련한 중국 배를 타고 요동 반도의 백가점으로 갔다. 


그러나 백가점 교우촌은 아편 전쟁의 여파로 외국인을 포함한 이들 일행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리하여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는  11월 3일 요동 북단에 있는 양관의 교우촌으로 떠났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어떤 과부의 집으로 옮겨야 했다.  


이 곳에서 김대건은 조선으로부터 온 연락원에게서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가 순교했고 (김대건의 편지 본문에는 2명의 외국인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는 3명이  순교하였음) 유진길은 주모자로 죽임을 당해 시체가 여섯 조각으로 찢겨 새들의 밥이 되었으며 가족이 모두 멸족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직 김대건의 아버지와 최양업의 부모님 순교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처럼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1842년 12월 22일을 조선으로 가는 출발일로 정하였는데  연락원들이  위험하다고 반대하였고  베롤 주교 역시 김대건에게 위험하다며  메스트르 신부가 동행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김대건은 12월 23일, 연락원 2명과 함께 중국과 조선 국경에 있는 변문으로 가게 되었으며 이 후의 일은 여섯 번째 편지에 기록된다. 


<참고>

조선으로부터 온 연락원...김 프란치스코를 지칭하며  이 사람은  8년 전 김대건이 정하상과 조신철 등의 안내를 받아 마카오로 떠날 때 함께 있던 사람..


 

<다섯 번째 서한 전문>


 

예수마리아 요셉

리브와 신부님께    (백가점에서),1842년 12월 21일

 

우리는 계획한 대로 에리곤 호를 타고 우리의 선교지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신부님께 알려 드렸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아주 엉뚱한 다른 일들이 연거푸 일어난 뒤에 우리는 산동 대목구 장이며 강남 직할 서리구장이신 존경하올 플로렌티노 베시 주교님께로 인도되었습니다.

 

우리는 주교님으로부터 아주 환대를 받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신자의 배를 마련해 주셔서 약 보름이 걸려 우리가 목적했던 태장하 항구에 다다랐습니다. 이 항해는 순조로워 아무런 역경도 당하지 않았고, 다만 북풍이 우리의 항진을 더디게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배 안에서는 네 사람 외에는 모두 신자들이 어서 이들은 우리를 잘 대우해 주었고, 신부님들께서는 매일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범 요한은 일을 주선하도록 요동 교우들에게 파견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두 요셉이라고 하는 회장을 대신 보냈습니다. 공경하올 신부님들과 우리에게 신부님들을 밤에 내리게 하는 일이 맡겨졌으나, 주변 상황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이 환히 밝은 후에야 외교인들의 작은 배로 짐을 보내고 우리는 두 요셉의 안내로 배에서 내렸습니다. 짐을 운반하기 위하여 두 명의 선원들이 우리 배에 올라탔는데, 그들은 신부님들을 보고 비웃으며 서양 사람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세관에 접근하였을 때, 두 요셉은 저에게 방금 물이 빠져서 대단히 질퍽거리는 강변에 신부님과 함께 내리라고 귓속말을 하였습니다. 그곳은 세관에서 마주 바라보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신부님들이 세관에서 봉변당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토마스(최양업)와 함께 세관으로 직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브뤼니에르 신부님, 2명의 선원, 그리고 저까지 5명이었는데, 모두 발이 진흙에 빠졌고 길도 아닌 곳을 허둥대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외교 인들은 신부님들을 보고 영국인이라고 떠들어 댔습니다. 잠시 길을 걷고 있을 때 세관 쪽에서 30명가량이 우리를 향해 고함을 치며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경찰관인 줄 알았습니다. 이들 중에는 경찰관들도 있고 손님들의 안내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황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걸어가셨고, 그들은 오랫동안 질문하여 우리를 괴롭힌 후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백가점(白家店)이라 불리는 교우 촌으로 길을 재촉하였고, 두 요셉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촌락은 바다에서 60리가량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신자 약 200명가량이 사는 곳입니다.

 

두 요셉의 가족 외에는 이곳 신자들은 신부님 영접을 꺼렸고, 더구나 신부님을 쫓아내려고 음모를 꾸미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롤 주교님이 그들 집에 머무르시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인심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여 주교님과 신부님들에게 불쾌한 일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편지지가 넉넉하다면 신부님께 그런 사정을 전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토마스와 함께 개주 부근에 있는 양관(陽關)이라는 교우 촌에 계시고, 메스트르 신부님은 저와 함께 어떤 과부의 조그마한 집에 머물러 있습니다.

 

조선에서 온 소식에 관해서는 스승님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존경하올 베롤 주교님이 변문(邊門)에 파견한 연락원이 외교인들한테서 얻어 듣고 돌아 와 주교님께 보고한 바를 전해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조선어와 중국어와 서양어에 아주 능통한 2명의 외국인이 종교의 이유로 조선인 300명과 함께 참수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 아우구스티노(유진길)는 그렇게 엄청난 범죄의 주모자로서 죽임을 당하고, 그의 시체는 여섯 조각으로 찢겨 새들의 밥이 되었으며, 그의 가족은 모두 멸족 되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신부님들은 거짓 신자로부터 밀고를 당했다고 하며, 그자는 신부님 얼굴을 익히기 위해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공경하올 베롤 주교님과 메스트르 신무님의 계획대로 조선으로 갈 출발일 12월 22일로 정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은 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고자 하였으나 스승님도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위험이 없지 아니하므로, 존경하올 베롤 주교님께서 저에게 어려움이 더해질까 봐 염려하시어 메스트르 신부님과의 동행을 금하셨습니다.

 

만일 직접 대면하여 입으로 말씀드릴 수 있다면 아직도 스승님께 드릴 말씀이 많으나, 편지에 손으로 이 모든 사정을 일일이 적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멈추고 공경하고 경애하올 스승님께 이 작은 아들을 기도 중에 항상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순명하는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인사드립니다.

 

추신

새 소식을 추가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개봉하였습니다.

 

 

 ..........

 

<참고>

베롤 주교 (1805-1878)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초대 만주교구장.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황청에  만주교구 설정을 건의하여 북경교구에서  만주교구가 분리되었다.  


베롤 주교는 1849년 민주지역의 박해 때문에 잠시 프랑스로 피신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만주에 머물면서 만주, 요동, 몽고 등의 선교에 힘쓰는 한편, 조선의 선교를 적극 지원하여  조선 교우들이 보내 온 박해 상황과 소식을 교황청에 보고하였다.


1843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과 1854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성성식을  주례하였으며 메스트로 신부, 김대건, 최양업 신부의 입국을 도왔다.


김 프란치스코..

조선교회의 밀사. 기해박해 이전부터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에 앞장섰다. 조선교구 설정 이후에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36년 1월 조신철 등과 함께 변문에서 모방 신부를 영접했고 1842년 12월에 책문 근처에서 김대건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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