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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네 번째 서한 살펴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7-31 20:22 조회1,647회 댓글2건

본문

 

     내 용

 발신(작성)일

 발신(작성)처

 수취인 

 수취일 

  비고

 첫 번째 서한 

 1842.2.28

 마닐라

 르그레즈와

 미상

 

 두 번째 서한 

 1842. 5월경 

 주산

 리브와

 미상

 유실

 세 번째 서한 

 1842. 9월경 

 상해

 리브와

 1842. 9.27

 

 네 번째 서한

 1842..12. 9

 요동(백가점)

 르그레즈와

 1844. 2.27

 

 

 

<​네 번째 편지 작성 배경>


네 번째 편지는 세 번째 편지에서  언급한 대만. 주산도, 오송구의 풍경 등을 더 세세하게 설명하고 남경에 있는 보은사(報恩寺)라는 절에 관해서 자세하게 적고 있다.


김대건 일행은 에리곤 호를 타고 조선으로 입국할 방안을 찾고 있었지만 세실 함장이 계획을 보류하자 1842년 9월 11일 에리곤 호에서 하선하였고  9월 17일 상해의  베시 주교 집에서  최양업과  다시 만났다. 


10월 12일,  이들은  베시 주교가 주선한  중국 신자의 배를 타고 상해를 떠나  열흘 만에  요동 반도의  태장하 (太莊河, 지금의 요녕성 장하시)에 도착했다. 


이들은 태장하 인근의  교우촌 백가점(白家店)에 있는 (杜) 요셉 회장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아편 전쟁의 여파로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반감이 커져서  11월 3일,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는 요동 북단에 있는 양관 교우촌으로 떠났고  김대건과 메스트로 신부는 어떤 과부의 집으로 옮겨야 했다. 


여기에서 김대건은 메스트르 신부에게 계속 신학을 배우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연락원을 통해 들려온 조선의 소식은 모방, 샤스탕 신부, 엥베르 주교가 순교했고  유진길을 비롯한 조선인 300여명이 순교했다는 것이다. ( 기해 박해)


이처럼 위험하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1842년 12월 20일 조선으로 출발하겠다고 정하였다. 연락원들과 다른 사람들도 이 계획은 무모하고 위험하다고 만류하였으나 김대건은 우리로서는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 편지에 적고 있다. 


12월 9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러한 내용을 적은  네 번째 편지를 발송하였다.



 <네 번째 편지 전문>


예수마리아 요셉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요동(道東) (백가점)에서, 1842년 12월 9일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우리가 아직 마닐라에 있을 때 신부님께 편지를 올렸으나, 그동안의 우리 여행에 대하여 보고를 드리려 신부님께 다시 편지를 올립니다. 

마침내 우리는 마닐라를 떠나 순풍을 따라 항해하여 대만(臺濟) 섬까지 다다랐으나, 거기서부터는 작은 폭풍우와 역풍을 만났습니다.

 

신부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섬은 길이가 6백 리로서 초목과 산림이 울창하고 경치가 매우 좋을 뿐 아니라 토지도 매우 비옥하게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높은 산 즉, 新高山도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흰 눈이 덮여 있습니다. 이 섬의 주민들은 특유한 방언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가 우리에게 생선을 팔려고 다가왔는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섬을 떠나 며칠 지나서 주산에 닻을 내렸습니다. 이 주산은 산이 많고 메마른 많은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시내 구경도 하고 또 얼마 전에 부임하신 라자리스트 신부님들을 만나볼 겸 해서 주산 시내에 몇 번 들어갔는데, 원주민들 외에는 신기한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원주민들을 ‘검은 악마’라고 부르고 멸시하여 왕처럼 손에 지팡이를 잡고 겁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산에서 약 두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동안에 영국인들이 남경을 탐험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므로 우리도 그들을 따라 나흘 걸려 양자강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강 중간에는 숭명(Tchong-ming, 崇明)이라고 하는 상당히 큰 섬이 있는데, 갈대와 초목과 숲이 빽빽이 우거지고 주민도 많으며, 섬 이름과 같은 도시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작은 개울들이 사방으로 흘러서 대체로 푸르르고 쾌적하며 비옥한 평야입니다.

 

강 오른쪽에 두 개의 도시가 있는데, 하나는 보산(演山)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오송구 라고 합니다. 오송구는 양자강의 황해(黃海)어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도시는 영국군들의 공격으로 주민들은 모두 피난하여 텅 비었고 전투 때문에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오송구 방면에서, 운하라는 말이 더 맞는 두 개의 강들이 양자강으로 흘러드는데, 작은 것은 온조병(溫爲兵)이라고 하고, 큰 것은 황포강(黃消江)이라 합니다. 황포강은 상해 시내를 통과합니다.

 

상해는 해안에서 40리 떨어져 있는 도시로 영국인들에게 개항된 항구 중 하나입니다. 7월 하순에 영국군이 남경을 점령하려 진격한 지 약 15일 후, 중국 저급 도시인 진강부에 도달하여 단 시일에 함락시키고 요새에 군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1백 명 이상의 영국 군인들과 3천 명의 달단 군인들이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달단 군의 장군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자기 집에 돌아와 집에 불을 질러 아내와 자녀들과 온 가족이 다 함께 타 죽었다고 합니다.

 

그동안에 우리는 출발할 날을 고대하며 오송구에서 퍽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실 함장이 남경 시내를 구경하기 원해서 중국 배 한 척을 임대하였는데, 에리곤 호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여 3명의 장교와 선원들을 데리고 출발하였는데, 저는 통역관으로 따라갔으며, 메스트르 신부님은 에리곤 호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출발한 지 약 6일 만에 진강부에 도착하여, 하루 동안 도보로 시가지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였는데, 전쟁으로도 파괴되고 강도들의 습격으로도 약탈 당하여 폐허가 된 시가지는 사방에서 악취가 났습니다. 시가는 두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달단인들의 거주지였고 하나는 중국인들의 거주지였습니다. 이것은 양자 강 오른쪽에 건설되어 있고, 맞은편에는 중국인들이 ‘운량호’라고 부르는 제국 운하가 흐르는데,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한 주요한 수문이 9개나 있다고 합니다.

 

진강부와 제국 운하 사이에 금산(金山) 즉 금으로 된 섬이라고 부르는 중국인들에게 매우 유명한 섬이 있습니다. 초목이 울창한 그 섬에는 두 명의 황제 무덤과 황제 직할의  절과 고대로부터 유명한 제국 도서관이 있답니다. 전쟁 전에는 그 절에 3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거기서 닻을 올리고 떠나 남경에 가서 닻을 내렸습니다. 남경 시가는 파괴되지 않고 있었으며, 영국인과 중국인들이 강화 조약: 남경조약을  맺던 중이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눈앞에 당도한 영국군의 병력과 위협에 중국인들은 대경실색하여 강화를 청하였던가 봅니다.


황제는 4명의 고관대작에게 이 강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위임하여 8월 29일에 강화 회담을 마치고 조약문에 조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오래 지속 하지 못하리라고 단정하는 중국인들이 많습니다.

 

신부님도 아마 아시겠지만, 남경 시에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탑이 있는데, 장교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가기에 저도 그들을 따라가서 탑과 시가 전체를 구경하였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남경은 인구가 1백만 명이라고 하는데, 아주 평탄하며 두 개의 운하로 구분되어 인고, 도시는 크고 넓지만 아름답지는 못합니다. 도시 북쪽에 산, 즉 종산이 있는데, 그곳에 영국군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보은사(報恩寺)라고 하는 절 가운데 높이가 200척이나 되는 탑이 세워져 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의 돌들과 도금한 돌들로 되어있고, 그 돌들 위에는 여러 신상(神像이 조각 되어 있습니다.

 

탑의 외부는 여러 가지 색깔의 기와로 입혀져 있는데, 그 모양은 팔각형이고,150개의 작은 종들과 2개의 금 구슬이 있고, 그 밖에도 눈에 띄는 등이 12개나 달려 있는데, 이 등들 덕분에 위로는 3천(하늘)을 비추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비추어,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을 분간한다고 중국인들은 미신같이 믿고 있습니다. 탑의 맨 꼭대기에는 무게가 900근 이나 되는 질그릇 단지 두 개와 천반(天盤) 즉 하늘의 접시라고 하는 450근의 접시가 있습니다. 탑이 광채로 온 세상을 비춘다고 믿고 들 있습니다. 탑의 기단에는 여러 겹의 둥근 원이 있는데, 그 무게가 3,600근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탑을 다섯 가지 보석으로 꾸몄는데, 그것들은 각각 밤을 비추는 야명(液珠), 비를 쫓는 비수주(備水珠), 화재를 쫓는 비화주(備火珠), 폭풍우를 피하는 비풍주, 먼지로부터 탑을 보호해 주는 비진주(備塵珠)등으로 불립니다. 또 그 밖에 중국인들의 경전 3권이 보관되어 있는데, 비교(秘敎)의 책인『장경(藏經)』,기도서 아미타불경(阿彌陀佛經), 부처님 경배 권유서인「접인불경(接引佛經)』이라는 것들입니다.

 

이 절과 탑의 기초는 대략 2천 년 전에 세워졌답니다. 처음에는 탑의 이름을 고이왕탑(阿育王塔,Go-i-ouang-ta)이라고 불렀다가 체우(tsee-ou)라는 황제가 즉위 제3년에 퇴락한 절을 보수하여 건초사(健初寺,Kien-tcho-se), 즉 첫째 절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카오 (Soun-kao)라는 사람이 절을 쇠붙이로 파괴한 것을 진왕조의 키엔운(Kien-un) 황제가 재건하여 장간사,(Tchang-kan-se)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러나 스무 번째 왕조(王朝)인 원(元)에 이르러서 화재로 전소 된 채로 있다가, 스물 한 번째 왕조인 명(明)의 영락 황제가 예전의 상태로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청(淸)까지 스물 두 개의 왕조가 있었습니다. 그 절을 재건하는 데 19년이 걸렸는데,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탑에만 거의 400만원 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캬친,(Kia-tchin) 황제 때에 다시 탑의 3분의 1이 벼락으로 파괴되었고 그것을 근래에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관광을 끝마치고 오송구로 돌아오는 도중에, 우리가 고대하던 파보리트 호를 만났습니다. 그 배로부터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그의 두 동행인 토마스(최양업)와 범 요한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괴로움을 한꺼번에 느꼈습니다. 우리가 모두 모였으니까 즐겁기는 하나 우리의 사정이 더욱 곤란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또한 서글펐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제가 에리곤 호에 도착해 보니,신부님들이 범 요한에게 브뤼니에르 신부님을 안내도 하고, 베롤(J. Verolles) 주교님께로 가는 짐도 처리하도록 상해의 신자들에게 심부름을 보냈었는데, 그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실 함장이 조금 있다가 출범할 것이라고 똑똑히 말하였지만, 범 요한을 온종일 기다려도 허사였고, 속히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은 부득이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에게 여행 보따리를 맡기고 육지에 내려서 범 요한의 귀환을 기다리게 하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비하신 안배로 다행히 우리와 오래전부터 친밀히 교제하였던 황세흥이라는 해변에 거주하는 외교인이 에리곤 호 출항 전날 저녁때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그리하여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는 그의 동의를 얻어 여행 보따리를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예정한 대로 에리곤 호로 우리의 포교지인 조선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으나,세실 함장은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조선으로 갈 항해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이 질문하니까 그는 자기가 조선을 향해 항해하기는 하겠으나, 만일 항해 중에 어디서든지 역풍을 만나면 곧바로 마닐라로 뱃머리를 돌릴 것이라고 조건부로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딱한 형편에 처해 있었으므로 메스트르 신부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마닐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봐 근심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세실 함장이 돛을 펴고 출범하려 할 때, 마침 범 요한이 돌아와 당시 상해 근처에 체류하던 산동 지방의 강남 직할 서리구장이신 존경하올 베시 주교님께서 짐 보따리에 대해 조치하신 경위를 신부님께 보고하였습니다. 그 보고를 듣고 신부님은 더 안전한 편을 취하기로 하고, 저와 함께 황세흥 씨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범 요한과 토마스를 데리고 그 근처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 군함을 타고 변장한 뒤 베시 주교님께로 급히 갔습니다.

 

우리는 그 외교인 집에 5일 동안 묵은 다음에 같은 군함에 올라가서 숙박을 청하였더니, 그 군함은 우리를 매우 환대하였습니다. 하루를 지낸 후, 우리는 주교님께로 가서 환대를 받았고 주교님의 알선으로 어떤 신자의 배를 타고 약 15일 걸려 우리가 향해 가던 태장하(太莊河)에 입항하였습니다. 이 항해 중에 역풍으로 두세 번이나 출범하였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 외에는 별로 역경은 없었습니다.

 

일을 주선하도록 범 요한을 교우촌에 심부름 보냈더니, 그는 거기에 머물고 두(荳)요셉이라는 교우촌 회장을 우리한테 보내왔습니다. 신부님들은 밤에 군함에서 내려 상륙하기로 작정하셨으나, 주위 환경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낮에 교우촌 회장을 따라 상륙하였고, 짐 보따리는 다른 배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떤 외교인들이 신부님들을 보고 유럽 사람들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세관에 가까이 갔을 때, 안내자는 여러 가지 귀찮게 질문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에게 강변에 내려서 검문 장소를 슬그머니 지나가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곳은 물이 빠진 지 얼마 안 되어 대단히 질퍽거렸는데, 세관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한편, 두 요셉은 토마스를 데리고 일을 처리하러 세관으로 곧장 갔습니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님, 브뤼니에르 신부님, 두 명의 선원들과 저 이렇게 다섯 명이었습니다. 외교 인들은 우리가 질퍽하고 길도 없는 강변에서 허둥거리는 것을 보고, 한편에서는 신부님들을 영국인들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장정 20명가량이 고함을 치며 우리한테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손님 안내자들이었는데, 우리는 그들이 경찰관인 줄 알고 겁이 났습니다. 사실 그들 중에는 경찰관도 몇 명 있었습니다. 장소 관계로 조금 떨어져 있던 선원들에게 제가 귓속말로 신부님들 곁으로 가까이 가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무서워서 안색이 변했고 고개도 쳐들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붙잡으며 여러 가지 질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우리가 소매 속에 감추어 가지고 가던 책 때문에 무척 걱정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여전히 붙잡고 질문을 하였으므로 제가 화난 소리로 “당신들은 안녕 질서를 위하여 정부에서 임명된 경찰관들이면서 무고한 인민을 모욕적으로 대한다”라고 꾸짖었더니, 우리를 내버려 두고 떠나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 동안 두 요셉 회장과 토마스는, 우리가 체포되어 법정에 끌려가는 줄로 짐작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다음에 우리는 수레를 타고 요셉의 집에 다다랐으나, 두 씨 가족 외에 다른 신자들은 모두 신부님들을 맞이하기를 꺼렸습니다. 


베롤 주교님이 그들 집에 유숙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던 만큼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범 요한과 토마스는 개주(蓋州) 근처의 교우촌 으로 갔고,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어떤 과부의 작은 집을 세내어 머물면서, 조선으로 출발할 날과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선에 대한 확실한 소식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베롤 주교님에 의해 변문(邊門)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연락원은 외교인 상인들한테서 들어서 안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연락원이 조선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고 합니다.

 

“두 명의 외국인이 3백 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잡혀 다 같이 사형을 받았고, 왕의 통역관 유 아우구스티노는 이 불행한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참수 된 후 그의 시체가 여섯 갈래로 찢겨 새들의 밥이 되었으며, 그의 온 가족이 멸족되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그 외국인들과 조선인들이 학살되었느냐고 연락원이 다시 물으니, 그 외국인들은 3개 국어 즉, 조선말, 중국말,서양말과 글에 정통한 자들로서, 나쁜 종교로 조선 사람들을 부패시켰기 때문에 학살되었고, 조선인들은 사악한 종교를 받아들여 그 서양인들을 추종하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연락원이 세 번째로 질문하니까 그들은 대답하려 하지 않더랍니다.

그 밖에도 신부님들이 체포된 것은 거짓 신자 가 밀고했기 때문이라고 연락원이 보고하였습니다. 그 거짓 신자는 신부님들의 얼굴을 익혀두려고 천주교를 믿고 신부님한테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이 불확실한 가운데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12월 20일을 기하여 조선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연락원들과 다른 사람들은 이 계획이 무모하고 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단언하면서 조선과의 연락은, 하느님께서 큰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하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하고, 우리의 계획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우리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계획하고 있느니 만큼, 조선에 들어갈 가능성만 있다면 무슨 위험인들 마다하겠습니까? 더구나 메스트르 신부님의 출발은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닙니다. 신부님은 저에게 어려움이 가중되지 않도록 저와 동행하는 것도 주저하고 계십니다.

 

스승님도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위험이 없지 않고, 또한 주위 상황과 저의 무능과 허약함이 이 위험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은혜로 위험 중에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벌써 다 준비되었고, 옷과 신발은 가능한 한 같이 묶어 두었습니다. 조선에 들어갈 때는 더 쉽게 잠입하고 악마의 심부름꾼들 편에서 우리를 덜 주목하도록 거지로 위장할 작정입니다. 이곳은 모든 분이 다 안녕하시고 저도 허약하나마 그럭저럭 건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만 편지를 끝내면서 스승님께 의지하는 이 작은 아들을 하느님과 성모님 대전에 항상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조선에 들어간 후에 저에게 닥칠 모든 사항에 대하여 스승님께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지극히 좋으시고 공경하올 스승님 내내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한 아들 조선인 김 안드레아가 인사드립니다.

 

추 신

이 편지를 개봉하고 새 소식을 추가합니다.

저는 매일 메스트르 신부님한테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으며, 토마스는 만주에서 페레올 주교님 곁에 있습니다. 저는 요즘 프랑스어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이 유럽에서 온 서한을 받으시고 저에게 프랑스어 공부를 포기하도록 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어 회화는 저에게 분명히 유익하지 않습니다만, 에리곤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기에 약간은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스승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프랑스어 독서는 저에게 무익하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애써서 배운 프랑스어 독서를 전적으로 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듯합니다. 만일 제가 불라사전(佛羅辭典)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금쯤에는 프랑스어책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떠나올 때 리브와 신부님이 저에게 프랑스어책들을 주셨는데, 그 가운데서 몇 권은 메스트르 신부님의 분부로 버렸습니다. 토마스는 프랑스어책들을 읽을 허락을 받았는데, 그 프랑스어책들은 그가 마카오에서 떠나올 때 리브와 대표 신부님이 유럽에서 온 서한을 받은 후 불라사전과 나불사전과 함께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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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님의 댓글

나무 작성일

참고 

라자리스트 회 : 1625년 빈첸시오가 프랑스에서 창설한 선교 수도회.
                        1699년 중국에 진출하여 프랑스 예수회의 선교 활동을 계승하였다
                        1790년 조선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에게 세례를 주었다
백가점  : 요동 반도 남단에 있는 백씨성 집단 교우촌
양관    : 요동의 개주시 나가점. 만주 대목구의 중심지
달단인  : 타타르인, 중국 56개 부족 중 하나인 타타르족은 주로  신장 위구루 지역에 모여  살며
              이슬람교를 믿는다

거짓 신자 : 김순성 요한 또는 김여상이라고 불리우던 배교자, 밀고자를 말함
            1839년 기해박해 때 자신의 출세를 위해 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현석문 가롤로 등 지도급 교우들을 밀고하였고,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도록 했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등 여러 교우들도 밀고하였다.
            그러면서도 교우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참석하여 교리 문답과 성서를 읽으며             
          모범을 보이는 체하면서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동정을 염탐하였다.
 
          그는 밀고의 댓가로 하위 관리가 되었으나 다시 신자들을 괴롭히려고 모의하던 중,
          죄인으로 몰려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1862년 8월 21일 참수되었다 .

베롤 주교 (1805-1878) :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초대 만주교구장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 1791-1839)  :  성 유대철 아버지

 역관 출신으로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조선에 성직자 영입 문제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유방제, 모방, 샤스탕 신부와 엥베르 주교를 조선에 입국하도록 도왔으며.
 또한 역관 신분을 이용하여 중국을 왕래하며 조선 교회의 사정을  중국 교회에 알렸다

1839년 기해 박해 때 모역죄로 서소문에서 정하상과 함께 참수 순교.
1925년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시성되었다 ​

나무님의 댓글

나무 작성일

기해박해 :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

1801년에 있었던  신유박해로 천주교의 교세는 크게 꺾였으나 그후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1831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를 분립시켜 새로이 독립된 대리감목구(代理監牧區)를 창설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교구의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

1836년에 밀입국한 모방 신부에 이어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이 들어 와 비밀리에 전교사업이 진행되었고, 신도의 수도 크게 늘어나 1만 명을 넘게 되었으며, 천주교가 민간에 널리 퍼져 사람들이 이를 크게 이상하게 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아편 전쟁의 여파로  조선  조정에서는 다시 서양세력을  막아야 한다고 하여 박해의 논의가 일어났으며 1839년 3월에 이르러 천주교도에 대한 제2차 대학살을 감행했다..기해박해는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면적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으려는 벽파(僻派)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싸움이었다..

당시 안동 김씨들은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는데 천주교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었다. 이에 풍양조씨들은  권력 쟁취에 천주교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기해박해 때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를 비롯하여  참수 순교한 신자는 70명,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명이었고 이 중에 70위가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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