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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두 번째, 세 번째 서한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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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무 작성일21-07-23 14:30 조회1,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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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편지 작성 배경>

 

신학생 김대건은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 에리곤 호를 타고 조선으로 가기 전에, 필요한 물품을 장만하려고 1842년 2월 20일 마닐라로 갔다. 

(여기에서 첫 번째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출항 준비를 마친 에리곤 호는 4월 20일 대만을 거쳐 5월 11일 중국 항주만 앞바다에 있는 주산도에 입항 했다. 당시 주산은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김대건은 마카오에 있는 리브와 신부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냈지만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 세 번째 편지 작성 배경>

 

주산에서는 1842년 5월 11일부터 6월 21일까지 체류하였는데 영국인들이 남경 으로 떠날 때, 에리곤 호도 주산도를 떠나 6월 26일 오송구에 도착하였다.  

 

에리곤 호가 오송구에  정박해 있는 동안  8월 13일 세실 함장 일행은 중국 배 한 척을 빌려 남경으로 향하자 김대건은 통역을 위해 그들과 동행하였다.이 와중에 김대건은 영국군 공격을 받은 진강부가 파괴된 모습을 목격하였고 중국인들이 강화를 요청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김대건은 8월 29일 영국과 청나라 간의 남경조약을 체결하는 장면을 참관한 후 오송구로 되돌아 와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 호로 타고 오송구에 와 있는 만주 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 신학생을 만났다. 

 

최양업을 만난 기쁨도 잠시, 에리곤 호 세실 함장이 조선 행을 포기하는 바람에

이들과 헤어져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황세홍의 집에 머물면서  리브와 신부에게 세 번째 편지를 발송하였다.

 

 

< 세 번째 편지 전문>

 

예수마리아 요셉  (상해에서18429마카오의 리브와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우리가 아직 주산에 있을 때 신부님께 제가 짧은 서한을 드렸습니다. 이제 다시 짧은 서한을 드립니다. 

마침내 우리는 주산에서 돛을 펴고 출범하여 영국 함선 20척과 함께 양자강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출발할 날을 기다리며 오늘까지 머물러 있습니다. 세실 함장이 약속한 대로 우리는 에리곤 호로 조선에 갈 것으로 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아주 많이 변하여 조선으로 갈 가망은 거의 없어졌습니다.왜냐하면 세실 함장은 마닐라로 향하여 출항하였고우리는 지금 여행 보따리를 가지고 양자강 기슭에 있는 어떤 외교인의 집에 머물고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에리곤 호로 출발할 예정이었습니다. 세실 함장은 아직도 자기는 조선으로 갈 희망을 품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만만일 조선으로 가는 항해 중에 역풍이 불어 닥칠 경우에는 조선으로 갈 항로를 바꾸어 마닐라로 향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렇게 애매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메스트르 신부님은 에리곤 호에 머물러 있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산동 주교님의 안배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브뤼니에르 신부님이 상해에 계시는 주교님께 파견하였던 범요한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 요한이 돌아오지 않기에브뤼니에르 신부님은 토마스와 함께 우리가 머물고 있던 집으로 갔는데, 우리는 에리곤 호로 출발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막 돛을 올려 출항하려는데 범 요한이 상해로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작은 배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메스트르 신부님은 즉시 계획을 바꾸어저와 함께 위에서 언급한 황세흥(黃世興)이라는 외교 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세실 함장은 마닐라로 출발하였습니다.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는 911일에 범 요한과 천주교 신자들의 작은 배를 동반하고 영국 군함을 타고 갔는데거기서 의복을 바꿔 입고 상해에 계시는 주교님한테로 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람의 도움을 모두 잃고 외교인 황세흥 씨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달리 조선으로 향해 갈 길을 모색하며 출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님도 아마 아시다시피, 영국군은 여기서 강 오른편 연안에 있는 몇몇 도시와 상해를 함락시키고 남경南京으로 진격하였습니다. 도중에 성곽과 천연적 지형으로 방어된 도시도 점령하였는데그 도시는 진 강부(江府라고 불립니다.

 

 이 도시의 왼편에 있는 제국 운하 근처로 강을 거슬러 을라가면금으로 된 섬이라는 금산 이 있습니다. 영국군이 남경에 도착하여 그 도시 북쪽에 있는 산鐘山에 군대들을 상륙시키고 그 도시를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이 광경을 보고 벌벌 떨면서 영국군에게 강화들 청하러 사자를 보냈습니다. 영국군은 이런 사실을 알고 저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강화 조약(南京條約)을 맺고 829일에 조인하였습니다.

 

영국인들과 이 강화 조약을 맺은 중국 측 고관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황제의 외숙부 기엔著英대청 제국의 전권 대신 일리부 씨

 달단군의 장군 티, (作浦강남 총독 뉴킹 씨.

 

 

그 후 황제가 강화 조약과 그 조건을 승낙한다는 내용의 칙서를 내렸습니다

강화 조약의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중국은 영국에 배상금 21백만 원을 지불할 것.

 2. 중국은 6개 항구에서 영국과의 통상을 승인할 것.

 3. 영국은 북경 황제에게 대사를 파견할 것.

 

세실 함장은 남경에 상륙하기를 원하여 중국인의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하였는데그 배는 낡고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사용 불가’ 라고  되어있더랍니다. 실제로 그 배가 여러 군데에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보고, 더 견고한 배를 구하려고 뒤프레 씨와 저를 상해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상해 부근에 상륙하여 중국 관리의 도움으로 상당히 큰 배를 장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배를 젓는 방식이 달라서 두세 번 땅에 부딪혔습니다. 그 이튿날 군인들을 더 많이 파견하여 배를 끌어왔습니다.

 

이 배를 가져온 다음에 세실 함장은 자기 부관 뒤프레 씨와 (프랑스왕) 필리프의 사절, 지리학자와 저그리고 약 20명의 선원을 대동하고 16일 동안 항해한 후 강화 조약이 조인되던 바로 그 날 남경에 도착하여 조인식에 참석하고4명의 중국인 고관들을 전부 만났습니다.

 

그 이튿날은 남경 탑과 교외를 관광하였는데성 안의 시가지에 들어가는 것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영국인에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영국군이 위에서 말한 진강 부를 점령하는 데 150명의 군인을 잃었으며도시 전체가 파괴되어 악취가 가득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중국 고관은 영국군이 승리한 것을 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자녀들을 모아 놓고 집에 불을 질러 모두 함께 타 죽었다고 합니다. 메스트르 신부님도 편지하실 테니까 저는 많이 쓰지 않겠습니다. 스승님께 기도 중에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청하고아울러 내내 안녕히 계시기를 빕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무익한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추신

 

파리에 계시는 장상께서 우리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것을 금 하셨다.’ 는 것을 메스트르 신부님을 통해서 확실히 알았습니다. 프랑스어 공부에 관해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공부를 계속해야 할지또는 아주 포기해야 할 지를 대표 신부님(리브와 신부께 문의해 보라고 메스트르 신부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편지에 쓰신 대로 프랑스어 공부에 대해서 포기해야 하는지 또는 계속해야 하는지를 문의할 필요가 없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현 상황이 공부의 계속을 허용치 않으며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이유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 참고 > 


주산도 舟山島: 중국 절강성 항주 앞바다에 있는 섬

오송구 吳淞口: 상해 북부 지역의 항구

진강부 鎭江府​ : 중국 양자강 하류와 대 운하가 교차하는 지점

                  1842년 7월 21일 영국군이 이 곳을 점령하였다

금산 金山      : 진강 서북쪽에 있는 양자강변의 섬 

황세흥 黃世興 : 천주교인은 아니었으나 김대건 일행과 친분이 있는 중국인

범范 요한     : 중국과 조선 사이의 길잡이 역활을 하던 중국인 신학생

베시Besi 주교 : (1805-1971) 산동 대목구장 

파보리트 호   : 프랑스는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에리곤 호와 파보리트 호를 파견

 

남경조약 (1842.8.29)  : 제 1차 아편전쟁 (1840-1842)을 끝내기 위해 청나라와 영국 과의 사이에 맺은 불평등 조약. 이 조약으로 인해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갔고 상해, 광저우가 개방되었다.

브뤼니에르 신부(1816-1846):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1842년 7월  최양업을 데리고 요동으로 가는 파보리트 호에 승선해서 10월 요동에 도착한 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846년 지방민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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