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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첫 번째 서한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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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무 작성일21-07-12 21:57 조회1,811회 댓글1건

본문

*​ 1842년 2월 28일 마닐라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발송. 라틴어로 작성*

 

   <편지 작성의 배경>

 

성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솔뫼(현, 충남 당진)에서 출생, 박해를 피해서 일곱 살 때 골배마실(현, 용인군 내사면)로 이사하여 성장했다. 1836년, 15세 때  은이공소(현, 용인군 양지면)에서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에 있는 '조선신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당시 중국은 영국과 아편 전쟁 중이어서 이들은 1837년과 1839년 두 차례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최방제는 열병으로 죽었으며 두 신학생은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과정에 들어갔다. 

 

르그레즈와 신부는 1841년 프랑스로 귀국했고, 후임인 리브와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계속 수업을 받던 중 1842년  프랑스 함대 에리곤 호의 세실 함장이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 시켜 줄 것을 요청하자 이에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희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동승했다.

 

그런데 아편 전쟁이 끝나가면서 에리곤 호는 조선 원정 계획을 중단하며 마닐라에 기항하였다.  김대건은 다시 조선 입국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스승이신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첫 번째 편지를 써서 그간의 사정을 알린다.

 

 

    <편지 전문>

 

예수 마리아 요셉

마닐라에서, 1842년 2월 28일

존경하올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조선을 향해 출발하게 되어, 이 기회에 잠시 틈을 내어 신부님께 

짤막한 편지를 올립니다.

 

신부님께서 우리와 헤어지신 지도 벌써 아주 많은 날이 지났습니다.

 

2월 16일쯤에 리브와 대표 신부님께서 

메스트르 신부님이 저를 데리고 조선으로 가도록 배정하셨습니다. 

이 여행이 비록 험난한 줄을 알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사하게 지켜 주시리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갑니다. 그 군함은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 왕 이 중국에 파견한 사절 장시니 (D. Jancigny) 를 마카오에 태워다 준 군함입니다. 

마카오를 떠난 후,우리는 하느님의 보호로 순조롭게 항해하여 마닐라에 입항하였고, 여기서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장만해서 2월 말 쯤 출발할 예정입니다.

 

신부님 내내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이곳 신부님들과 우리도 모두 건강히 잘 있습니다.

 

신부님과 작별한 후로는 오늘까지 프랑스어 공부를 못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정에 대해서는 대표부 신부님들이 편지하실 것이므로 

저는 여기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최 토마스(최양업)는 지금 혼자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기도 중에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하며,

저도 신부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한 아들 김해(金海)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참고>

 

모방 (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서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사람

낯선 환경에서도 세례, 고해, 성체 성사 등을 집전하며 왕성한 사목을 펼쳤고

한국인 사제의 필요성을 느껴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등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사제가 되기 위한 기초 소양과 라틴어를 가르친 후 마카오로 보냈다

조선 당국이 외국인 사제를 적발하기 위해 천주교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하자 엥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포졸들에게 자수한 끝에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 

1984년 5월 6일 여의도에서 거행된 103위 성인 시성식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르그레즈와 (Legregeois, Pierre-Louis 1801-1866)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마카오에서  3명의 조선 신학생을 지도하였다. 조선 초대 교구장인 브르기에르 주교를 돕고  엥베르 주교, 모방 , 샤스탕 신부와 연락하며 조선 전교를 적극 지원하였다. 1842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로 전임되어  프랑스로 귀국한 이후 1860년까지 제자인 최양업 신부와 모두 15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선 교회의 상황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고하였다.

 

 

리브와(Libois, Napoleon 1805-1872)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1832년 중국에 입국한 후 1837년 마카오에 유학 온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에게  교회 음악을 가르쳤다. 1842년부터 1846년까지 김대건  신부로부터 그의 입국과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는 15통의 편지를 받고 이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하는 한편,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돕고, 조선 전교를 적극 지원하였다. 1866년  프랑스로 귀국하여 사망할 때까지 교황청 포교지 경리부장으로 재직하였다.

 

 

메스트르 (Joseph Ambroise Maistre 1808-1857)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마카오에서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쳤다.  1852년 조선에 입국하여 베르뇌 주교가 입국할 때까지 조선 교회를 이끌었으며  고아를 돌보는 성영회 사업을 펼치기도 하고 제천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857년 충남 합덕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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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님의 댓글

나무 작성일

<조선 신학교의 마닐라 피신에 대하여>

1836년 12월 3일 서울을 떠난 지 6개월여 간의 고생 끝에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당도한 김대건 일행은 긴장이 채 풀리기도 전에 파리 외방전교 회원들과 함께 마카오를 떠나야만 했다. 포르투갈 식민정치에 불만을 품은 청국인들이 8월에 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김대건 일행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오른 피난길의 기착지가 바로 마닐라였다.
당시 마닐라는 마카오보다 훨씬 규모가 큰 국제 무역도시였고
포르투갈인이 아닌 스페인 선교사 즉,  예수회원들이 진출해 있던 곳이다.

 다행히 1837년의 마카오 민란은  진압돼 다음 해 1838년 마카오로 귀환하게 됐으나 11월 26~27일 밤 사이에 김대건 일행의 맏형이던 최방제가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동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채 아물기 전인 다음해 1839년 4월 6일 마카오 민중이 재봉기하자 김대건과 최양업은 칼레리,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다시 마닐라로 피난 길에 올랐다. 마닐라로 피난 온 김대건 일행은 다행히 성 도미니꼬 수도회 원장 초청으로 마닐라 인근의 롤롬보이(Lolomboy)에 있는 성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에서 11월 마카오로 귀환할 때까지 약 6개월간 피난살이를 했다.

 그 후 1842년2월28일(2.15일 메트로신부와 에리곤 호 탑승 마카오출발) 대만으로 가기 위해 다시 이곳에 들러 10일정도 머물렀다.

롤롬보이 농장은  멘도사(Mendosa)가문의 사유지였다.
김대건 신부 시성을 기념해 멘도사 여사가 옛 수도원 터 일부를 1986년에 한국 천주교회에 기증해 이곳에 김대건 신부 동상을 세울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마롤로스 교구장 알마리오 주교 임석하에 고, 오기선 신부님 주선으로1986년 5월 22일 동상 봉헌식을 올린데 이어 2002년부터 성 안드레아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돼 성지 관리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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