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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님 서한 자료집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7-08 14:03 조회1,86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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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기념 자료집 제1집으로 간행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은  1996년 순교 150주년 기념으로 펴낸 바 있는, 같은 제목의 자료집을 좀 더 보충한 것이다.

 

​김 신부님의 편지는 현존하는 것과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을 합쳐 모두 21통인데 이 중 두 번째와 열다섯 번째 편지는 유실되었고, 아홉 번째 편지는 한문으로, 스물 한 번째는 한글로 작성되었으며,  그 외의 편지는 라틴어로 썼다 . 

 

한국 천주교회사의 중요한 자료인 김 신부님의 편지를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은 1984년 요한 바오로 교황 2세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및 103위 성인 시성식을 거행한 것을 축하하는 뜻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고문서를 기증함으로써 가능하였다. 또한 귀중한 자료를 받아 연구, 분석한 학자 신부님들의 인내와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국교회사 연구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지난 1964년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설립한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1922-2009),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친필 편지를 기증 받아 오고 라틴어 판독에 힘을 쏟은 최승룡 테오필로 신부님(1938-2017), 얼마 전 선종 하신 정진석 추기경님도 라틴어 번역에 참여했으며  그 외 여러 성직자들이 순교자의 삶과 영성을 세상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참고>

 

파리 외방전교회 (1658년 설립)

교황청 포교성성이 1658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포교상의 보호권을 분쇄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열을 이용하여 선교단체를 창설하고, 주로 아시아 지역에 종신 선교사를 파견한 선교단체.(다음 백과 참고)

 

1827년 사제를 요청하는 조선 교우들의 편지를 접한 교황이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조선에 진출하였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 입국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선교는 곧 고난과 순교를 의미했다. 

 

그러함에도  당시 태국에서 보좌주교로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했고, 1831년 9월 교황 그레고리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 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을 서둘러 만주에 도착했으나 입국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후,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에 제2대 조선 대목 앵베르 주교와 샤스탱 신부가 입국하여  3명의 소년을 마카오에 보내어 교육 받게 함으로써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배출했다. 

 

천주교 박해 시절을 거치면서 소속 선교사들이 많이 순교했고  1886년에야 양국 간 수호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포교 활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 받으면서  한국 천주교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

 

 

 

세 신학생들의 마카오 여정 예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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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나무님의 댓글

나무 작성일

조선신학교...

조선의 세 신학생을 선발한 모방 신부는 원래 만주 요동 땅에 신학교를 개설할 계획이 있었으나  청나라와 조선에서 박해가  계속되는 상황이었기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르그레즈와 대표 신부의 명으로  1836년 5월  급하게 신학교를 개설하여  <조선 신학교>라 명명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이 일대 해적을 퇴치한 공로로  1557년부터  상업기지를 세웠고 1576년 자국 선교 보호권 아래 마카오 교구를 설정하여 , 중국 전체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과 아시아에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마카오를 거쳐야만 했다.

세 명의 신학생들은 6개월 동안 걸어서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는데  마카오의  조선 신학교는 따로 교사를 갖추지도 못하였고  전담 교수가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칼르리 신부가 임시로 교장을 맡고, 대표부의 신부들과 임지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던 선교사들이  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신학생들의 거처와 교실은 모두 대표부 안에 있는 작은 방들에 불과하였다.

아편전쟁의 여파로 잠시 필리핀 마닐라로 피하였다가  마카오로 귀환한 뒤, 조선 신학교는 메스트로 신부가  관심을 갖고 지도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이 1842년 7월에 마카오를 떠나면서 마카오의 조선 신학교와는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조선 귀국로를 탐색하면서  만주 장춘의 소팔가자 에서 계속 신학을 공부하였다.

나무님의 댓글

나무 작성일

< 세 신학생의 마카오  여정  >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은 1836년 12월 28일 압록강을 건너 국경 지대인 중국 변문에서  조선으로 입국하는 파리외방전교회  샤스탕 신부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이 자리에는 조선에서 선교하다 본국으로 귀환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길 안내인으로 함께 한 조선 신자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현석문 등이 있었다.  세 신학생과 신자들은 샤스탕 신부에게 모방 신부의 안부와 편지 등을 전해주고, 조선 교회 상황을 설명했다.


세 신학생과 샤스탕 신부는  잠시의 만남을  끝으로 다시는 이 세상에서 만나지 못할 작별을 하였는데  세 신학생은 중국옷으로, 샤스탕 신부는 한복을 입은 후 서로의 길 안내인들과 함께 반대편 길을 향해 걸어갔다.

 원래 중국 요동과 산동 지역의 지리에 밝았던  샤스탕 신부는  세 신학생을  바닷길을 이용해 마카오까지 보내려 했다. 그러나  샤스탕 신부가  바닷길 안내를 맡기려던  돈 마르코와  고 요한 이란 사람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해고하는 바람에  계획이 바뀌었다.


세 신학생을 중국 변문에서 마카오까지 동행할 새 안내인들은 서만자 출신 마리아노와 천 요아킴이었는데 이들이 절대로 배를 타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해상 길을 포기하고 심양을 거쳐 육로로 중국 땅을 걸어 6개월 만에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다.

세 신학생이 마카오까지 걸어간 여정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지만  청주교구 배티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가 펴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에 2 개의 예상 노정이 표기돼있다.  하나는 한양-의주-변문-심양-마가자-서만자-장치-남경-상해까지 육로로 이동해 상해에서 바닷길로 복주를 거쳐 마카오까지 가는 노정이고 . 다른 하나는 한양-의주-변문-심양-북경-제남-남경-상해를 거쳐 배로 복주-마카오로 가는 길이다.(본문 지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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